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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문학동네

by 자몽커피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말하겠습니까. p.44




이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여자와 남자의 과거 이야기가 교차되어 나오고 현재 두 사람의 교집합인 희랍어 수업시간이 툭툭 튀어나오는 구성이어서 처음 읽었을 때는 산만하다고 느껴졌다.

한강 작가의 모든 책들이 그렇지만 한 번 읽어서 이해되는 책이 거의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재독, 삼독을 할수록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뚜렷이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한강 작가의 책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여러 번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하겠다.

<희랍어 시간>은 시각, 청각, 촉각, 감각 등의 모든 감각을 깨워주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다. 왜 한강작가의 책을 '시적 산문'이라고 하는지 가장 극렬하게 보여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1과 0 사이로 끝나는 소설은 세계를 살짝 비틀어놓은 수학적이면서 시적이다. 숫자 밑에 소제목이 있는 챕터와 아무 제목이 없는 챕터가 있는데 아무 제목이 없는 곳은 대부분 희랍어 수업시간이다. 이 부분만 따로 읽으면 철학수업에 참여한 수강생이 되는 마법 같은 일이 생긴다.



2. 침묵, 5. 목소리, 7. 눈, 9. 어스름, 11. 밤, 14. 얼굴, 17. 어둠, 19. 어둠 속의 대화,

20. 흑점, 21. 심해의 숲


10개의 소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보면 그 자체로 시가 되는 것 같다. 소설보다 시가 어려운 건 단어가 담고 있는 함축성과 낯선 조합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을 완독 했을 때 대단한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이유는 2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시집을 읽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 아닐까.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시작한다.


*여자이야기

여자는 대학 졸업 후 출판사와 편집대행사에서 일한 후 수도권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느 날 수업 도중 말이 나오지 않아 결국 직장도 중단된 상태다.

언어감각이 유달리 예민했던 여자는 4살 때 한글을 스스로 깨칠 만큼 영민했으나 열일곱 살 때 때 아무 이유 없이 언어를 상실하게 된다. 정신과 치료도 받지만 별 소득 없이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 그런데 우연히 불어인 '비블리오떼끄'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다시 말을 하게 된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p.15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처음의 침묵이 출생 이전의 그것에 가까웠다면, 이번의 침묵은 마치 죽은 뒤의 것 같다. 예전에는 물속에서 어른어른한 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딱딱한 벽과 땅을 타고 다니는 그림자가 되어 거대한 수조에 담긴 삶을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다. p.19



그녀는 침묵의 원인을 유년기의 체험에서 찾았다. 그녀를 임신했을 때 엄마는 장티푸스에 걸렸고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다 매끼 한 움큼씩의 알약을 복용했다. 기형아를 낳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 산부인과에 가서 아이를 지우려고 했으나 이미 태반이 형성돼 임신중절은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유도분만으로 아이를 사산시켜 주겠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두 달 뒤 낙태를 하려고 하였으나 그사이 태동을 느껴 그냥 그녀를 낳았다.

그녀는 자라면서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게 된다. 그녀의 탄생에 대한 비화는 언어가 세계와 결합되는 회로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해 주었고, 그 세계는 위태롭다고 느끼게 해 주었다.


반년 전 어머니를 여의고, 수년 전 이혼을 한 여자는 아이를 데려오려고 세 번의 소송을 했지만 모두 실패한다. 남편이 그녀의 십 대 때 정신과 기록을 들먹이며 그녀가 정신적으로 너무 예민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수입면에서도 남편은 은행 본사로 발령받은 데 비해 그녀는 수입원이 사라져 다음 소송도 불가능한 상태다.

그녀가 사설 아카데미에서 고대 희랍어를 배우는 것은,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에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로 언어를 되찾고 싶기 때문이다. 희랍어는 능동태, 수동태와 더불어 중간태가 있는데 이 태는, 주어에 재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표현한다.


...... 예를 들어 '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을 사서 결국 내가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에 중간태를 쓰면, 무엇인가를 사랑해서 그것이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영어에 'kill himself'라는 표현이 있지요? 희랍어에서는 himself 없이 이 중간태를 사용해서 한 단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p.19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매개체를 '고대 희랍어'어 둔 이유는 무엇인가?

언어를 배우는 첫 번째 목적은 대화를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고대 희랍어는 현재 쓰이지 않는 사어에 해당한다. 소통이 불가한 불구의 언어를 가르치는 입장이나 배우는 입장 모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도서관에서 개설된 산스크리트어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 강사가 '무용한 것을 가르치는 일이 아주 자유롭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희랍어 강사인 남자도 자유를 느낀 것은 아닐지.

오늘날의 유럽어는 오랜 과정을 거쳐 덜 엄격하게, 덜 정교하게, 덜 복잡한 모습으로 변화했고, 수천 년 전 정점에 이르렀던 고어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p.69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은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다고 한다. 우리말 '빛'에도 밝음과 색채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런 면에서 희랍어는 경제성을 띄고 있다. 한 단어로 세 가지 의미가 통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희랍어는 시적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는 언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이야기

남자는 15세 때 독일로 이민을 갔고 그곳에서 수학과 희랍어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인다.


동양에서 온 아이가 수학을 잘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희랍어는 달랐어.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도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 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p119



남자의 집안에는 유전질환이 있는데 반드시 실명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17세 때 의사로부터 섣부른 안과수술은 실명을 앞당길 뿐이며, 마흔 살쯤 실명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병원집을 드나들며 병원집 딸에게 호감이 생긴다. 현관 옆 창고에서 목가구를 제작하는 그녀는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 청력을 잃어버렸다. 이미 불안정한 시력을 가진 그가 그녀에게 호감을 가진 부분은 필름조각을 눈에 대고 태양을 올려다보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녀는 독순술을 배워 타인의 입술을 읽는 법뿐 아니라 말하는 법도 배웠지만 대부분 필담으로 대화를 나눈다. 남자는 그녀와 대화를 하기 위해 수화를 배운다.

남자는 처음으로 사랑한 그녀와 함께 살고 싶었고 생명이 있는 한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력을 끝내 잃는다면 남자는 그녀와 필담으로도 수화로도 말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독순술 수업에서 배운 대로, 무슨 말이든 나에게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은 주의 깊게 내 입술을 들여다보았고, 멍한 시선으로 내 눈을 마주 보았습니다. 나는 찬찬히 더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함께 살게 될 것이고, 나는 눈이 멀 것이라고. 내가 보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말이 필요할 거라고. p.47



이 사건으로 둘은 완전히 헤어지게 된다. 필사적으로 사과하는 그에게 여자는 주먹을 날리고 나무토막을 집어 얼굴을 내리친다. 여자는 남자에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그녀 자신이 듣지 못하는 목소리를 내라는 요구가 그녀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들렸던 것이 아닌지 짐작해 볼 뿐이다.

남자의 대학 친구인 요하힘은 시력을 잃어가는 그에게 삶은 결코 견디는 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점자를 배우고, 구멍을 뚫어 시를 쓰고, 근사한 리트리버를 사귀는 법을 배우라는 조언을 할 거라고 남자는 예측한다.


그 새벽에 문득 너는 나에게 물었지. 언제나 그렇듯 두려움 없이. 내가 받을지 모르는 상처를 대범하게 감수하면서. 언제가 눈이 멀 것이라는 사실이, 평소의 내 생각과 감정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느냐고. p.119




안경을 쓰는 사람이라면 집에 여분의 안경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특히나 오늘 토론에 파워 J가 많아서인지 시력을 잃어가는데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모습을 안타깝게, 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았다.

미래에 대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지가 아닐까? 운명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더 숭고하게 느껴졌다. 대부분 요하힘처럼 살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 남자의 대책 없음도 삶의 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조언이나 충고라고 하는 말들이 칼이 되는 순간을 잊지 말자.


서른한 살 남자는 서울로 돌아온다.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는 마흔 살 이후에는 모국어를 쓰는 곳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희랍어 초급반과 플라톤 원전을 강독하는 중급반을 맡고 있다. 한 반의 수강생은 여덟 명을 넘지 않고 서양 철학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들,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이 섞여 있다. 희랍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얼마간의 공통점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걸음걸이와 말의 속력이 대체로 느리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아마 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일 테지요). 오래전에 죽은 말, 구어로 소통할 수 없는 말이라서일까요. 침묵과 수줍은 망설임. 덤덤하게 반응하는 웃음으로 강의실의 공기는 서서히 덥혀지고, 서서히 식어갑니다. p.40




*찰나의 순간

두 남녀는 희랍어를 가르치는 선생과 학생으로 만났고 반년이 지나도록 말을 하지 않는 그녀를 그는 듣지도 말을 하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날 학원 건물 안으로 새가 들어오고 새를 밖으로 몰아내려다 남자의 안경이 깨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유일하게 학원에 나온 그녀가 남자를 도와준다. 남자의 집으로 온 여자와 남자는 침묵과 독백을 반복하고 여자는 작은 기척으로 화답하고 남자의 말에 공감한다.

가장 긴 챕터인 <19장 어둠 속의 대화>에서는 일방적인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독백이 이어지고 남자의 이야기에 여자의 경험이 계속 교차되며 이야기가 겹쳐서 쌓인다. 가장 영화적인 챕터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었는지 잊은 것 같다.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p.159


독한 취기 같은 피로가 그녀의 의식을 둔하게 만든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꿈인 것처럼, 아주 먼 곳에서부터 토막토막 끊긴 채 울려온다.


......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p.166




여자가 끝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이 둘의 대화는 침묵만이 유일한 것일까?


*보르헤스이야기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p.7


보르헤스의 묘비명이라고 한다. 이 한 줄의 문장은 고대 북구의 서사시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말년에 실명한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서슬 퍼런 칼날이 길게 가로놓여 있었던 것일까.


말을 하지 못하고,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 역으로 언어가 소통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언어가 수십 배의 육체적인 접촉이라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침묵으로 채우는 대화가 해답일 수 있을까?

타인과 나 사이에 있는 칼을 인정하고 결국 그 칼을 무디게 만들어 사용하든지, 아니면 아예 사용하지 않는 법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어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랍어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최소한의 문장으로 대화가 통했다는 점이다. 정말 필요한 말만 하고 산다면 , 정제된 말만 하고 살 수 있다면.

그와 그녀의 말들이 영원히 어긋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사랑은 계속되어야 한다. 눈빛과 손길과 체온으로 채워가기를.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p.184



*마지막 장이 22장이 아닌 0장인 것에 대해.

두 남녀의 과거와 현재까지의 이야기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두 남녀의 만남을 0이라고 한다면 이제 시작하는 남녀의 이야기는 새로운 1장이 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음의 정수와 0이라면 이 둘의 미래는 양의 정수가 될 것이므로 나는 희망적이라고 믿는다.

순환의 0이라는 의견도 있었는데, 영원회기의 틀에 가둬두고 싶지는 않다. 어긋나더라도 전진하기를.



*에피쿠로스의 역설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작가의 '신'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소개한다.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p.43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다면,

어느 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p.43



남자와 병원집 딸이 필담으로 나눈 대화이다. 희랍식 논증으로 따진다면 '신은 없다'가 되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신은 존재하고 선하고 슬퍼할 줄 아는 신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요즘의 상황과 연관시켜 본다면 신은 장난꾸러기?



탄생의 순간을 부정당했더라도, 끝내 시력을 잃는 삶이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0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운명을 담담히 받아내는 삶의 자세에 대해, 나의 언어는 얼마나 낭비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책, <희랍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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