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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amun Apr 25. 2023

베를린 당근케이크는 아프다

당근케이크 살해미수사건



최근에 베를린 여행을 일주일 정도 다녀왔다.

베를린은 암스테르담에서 비행기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고, 네덜란드와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가끔 기분전환 삼아 훌쩍 다녀오기 좋다. 이게 유럽생활의 최대 이점 아니겠는가.

 

베를린에 도착한 당일, 친구의 소개로 동네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한 카페를 방문하게 되었다. 치즈케이크가 맛있다는 이 카페는 정말이지 그 동네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방문할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동네 구석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해당 카페 전경 (좌,우)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투박한 나무벽과 오래된 가구, 그리고 벽에 가득 자리한 오래된 포스터들까지  카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오래되고 투박한, 하지만 정겨운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가게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케이크 진열장엔, 당근케이크와 치즈케이크가  영롱한 자태를 빛내며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테라스에서 단골인 듯 보이는 손님들과 맞담배를 피고 있던 점원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주문을 받았다.

치즈케이크와 당근케이크를 각각 하나, (당근 케이크는 참을 수 없지!)그리고 허브티를 시키고 카페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잔잔하게 깔린 히피스러운 90년대 사이키델릭 록 풍의 음악이 묘하게 에너지가 충만한 카페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고,  꾸덕한 질감에 산뜻한 레몬향으로 마무리되는 치즈케이크와 허브티의 조화는 그저 환상이었다. 당근케이크의 맛 또한 인상적이었는데, 입에 확 퍼지는 넛맥과 시나몬의 은은한 향이 나는 케이크와 부드러우면서도 사워크림의 톡 쏘는 느낌으로 마무리되는 프로스팅의 조화가 완벽했다. 그날 이후부터, 베를린에서 머무는 일주일 동안 그 카페를 두 번 정도 더 방문했다. 대도시인 만큼 가볼 곳이 많았지만, 당근케이크와 허브티의 마리아쥬는 매일이라도 맛보고 싶을 정도로 완벽했으므로.


그렇게 그 카페를 세 번째 방문하던 날이었다. 그전까지 늘 주문을 받아주시던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 종업원이 아닌, 잔뜩 찢어진 바지에 대마초의 향기(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를 풀풀 풍기는 남자종업원이 나를 맞았다. 그가 껄렁 거리는 태도로 메뉴판을 내 테이블에 던지던 순간, 나는 그놈이 만만치 않을 것이며, 오늘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 카페를 찾은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허브티랑 당근케이크 주세요.."

그 서버: 뭐?"

나 :허브티랑 당근케이크 달라고 했어요. "

그놈:뭐? 나 네가 뭐라는지 전혀 이해 못 하겠어."

나: (이때부터는 아예 메뉴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허브티요, 티ㅣㅣㅣㅣ!"


그냥 못 알아 들었으면 못 알아 들었다고 좀 더 존중하듯(공손히 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조롱하듯 과장되게 덧붙여지는 한숨과, 빙글거리는 그의 태도에 파이트 모드에 불이 들어와 버렸다.

빙글거림에는 빙글거림이 아니겠는가. 나도 그를 따라 (나름대로 해맑은 웃음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미소를 지으며, '야, 너 제대로 들을 수는 있는 거야?'라고 한 마디를 기어이 날려버렸다. 나에게서 어떤 반응을 그가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조상님들의 말씀은 옳았다. 빈정거리는 듯한 태도의 그는 어디 갔는지, 당황한 듯 주문을 대충 우물거리던 그는 도망치듯 카운터로 돌아갔다.


살짝 찝찝하긴 했다. 그가 나에게 무례하게 비치긴 했으나, 나 또한 그에게 무례하게 군 것도 사실이니. 그러나 계속 되짚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기회가 된다면 이후 계산할 때, 작은 팁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해야겠다 마음먹으며 가져온 책을 꺼내 읽었다.

시간이 흐르고 살짝 지루해지기 시작할 때쯤, 무언가가 내던지듯이 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고개를 드니, 이미 종업원은 카운터를 향해 가고 있었고, 주문한 티와 케이크가 덩그러니 올려져 있었다. 그의 놀라운 서빙솜씨로 인해 머그잔안에 있어야 할 물 절반정도가 쟁반 위에 고여있었다. 그 정도였다면 넘어갔을 텐데, 나는 보고야 만 것이다.

옆구리가 포크로 세차게 찍혀있는 내 불쌍한 당근케이크를.


그날의 불쌍한 내 당근케이크

정중한 서비스를 바란 적도, 기대한 적도 없지만 이런 해괴한 서비스라니.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하얘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쟁반을 그대로 들고 카운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쟁반째 친절하게 들고 카운터를 향해 오니, 살짝 당황한 듯이 웃으며(그 나름대로는 친절한 미소였을 수도 있었으나 내 눈엔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로 보이는) 그가 말했다.


"(친절한 척 웃으며) 문제 있어?"

"(덩달아 친절한 척 웃으며) 너한테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 나는 이런 식으로 포크를 꽂아서 케이크를 서빙하는 방식은 들어본 적도 없는데, 내가 모르는 독일의 에티켓방식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니? 그리고 괜찮다면 차 물을 더 채워줘. 네가 보다시피 물이 반이나 흘렀잖아? 이거 네가 흘린 거야. "


다다다 쏟아지는 질문과 요구공세에 카페가 얼어붙듯 조용해졌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 정말 조용히, 그리고 점잖게 얘기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우물거리던 그는 결국 말미에 '미안'이라는 말을 붙였고, 그제야 나는 쟁반을 그대로 카운터에 둔 채 내 자리로 돌아왔다.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긴 했지만, 내가 한 행위에 대해 딱히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이후, 그는 정중하게 다시 차와 케이크를 내왔고 나는 그의 성의와 정중함에 '쌩큐!'라는 말과 미소로 화답했다.


이후, 다른 독일친구에게서 카페등에서 간혹 서빙하는 포크가 떨어지지 않도록 케이크에 꽂아서 서빙하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그러나 카운터에서 멀어봐야 다섯 발자국도 안 되는 위치에 자리한 내 테이블과의 거리와, 그날 그의 전체적인 태도를 생각해 보면, 과연 그 이유가 전부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는 내 개인적인 생각과 인상일 뿐, 내 시각을 객관화할 수 없음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만약에'라는 전제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 땐, 나도 모르게 '내가 만약 '아시아인'과 '여자'라는 카테고리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었어도 이런 일을 겪었을까'하는 생각이 떠오르고 만다. 물론 약해 보인다 해서, 만만해 보인다 해서 놀리고 괴롭히는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는 일. 또한 타지에서 겪는 타인의 무례한 태도를 '인종차별'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내 편협한 시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저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내가 좀 더 성장하고,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려 할 뿐이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내가 '아시안' 그리고 '여자'인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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