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세타몰의 나라에서 살아남기
네덜란드는 서유럽에 위치하지만 위도가 높아 독특한 기후를 자랑한다. 한여름에는 오후 9-10시 정도에 해가 지고, 새벽 6시 전에 해가 뜨는 나름의 백야(白夜)를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스웨덴, 핀란드 같은 북유럽 국가들에 비견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름엔 너무 밝아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기 어렵고, 겨울엔 반대로 해를 보기 어려워 매시간 침대 속에 웅크리고 있게 된다. 겨울바람은 또 어찌나 차갑고 공격적인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옆이나 앞에서 불어오는 돌풍 탓에 넘어지기도 하고, 허벅지가 터질 듯 페달을 밟아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겨울에는 오전 8-9시에 해가 뜨고 오후 4-5시에 지는 날이 대부분이고, 가장 짧은 날에는 하루 6-7시간 정도만 해를 볼 수 있다.
이런 날씨 때문에 만성피로, 무기력증, 심하면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머타임이 끝나고 시작되는 긴 밤은 사람을 더 괴롭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잠은 길어지고, 활동은 짧아진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가족과 함께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은 더욱 고독하고, 외로움이라는 어둠에 빠지기 쉽다.
이런 다양한 환경적 변수들과 의료 시스템의 특성이 합쳐져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강해진다. 그리고 나도 덩달아 강해져야 했다.
네덜란드에서 산지 어언 6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문득 깨달았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병원 이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째서일까? 한국에서 살 땐 조금만 아파도 병원으로 향했던 내가 왜 유독 네덜란드에서만큼은 병원 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을까?
허풍 조금 섞어보자면, 나는 개복치급의 면역력을 자랑하는,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최고의 최약체다. 그런 내가 6년간 병원을 한 번도 안 갔다니. 의료보험이 없어서? 절대 아니다. 매달 은행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월 19만 원의 보험료는 정말 말 그대로 뼈가 시릴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병원을 가는 과정에서 내가 정신적으로 받는 타격이 보험료보다 크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한 번쯤은 크게 아픈 순간이 온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지나가던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마치 두꺼운 귀마개를 낀 듯했다. 전날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냈는데도 숙취처럼 두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침을 삼키니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목이 부어있었다.
한창 코로나로 온 세계가 들썩이던 시기였다. 떨리는 손으로 간이 코로나키트를 꺼내 들었다. 다행히 결과는 음성. '죽을병 아니니 이틀 정도 더 지켜보지 뭐'라는 마인드는 네덜란드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어쩔 수 없이 기본 탑재된 마인드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결국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하게 Huisarts(네덜란드의 주치의)와 예약을 잡았다. 다음 날 오전에나 간신히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두통 증세는 여전했고, 이젠 귀마저 먹먹해서 물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진료실로 들어서자 다소 헐렁하게 마스크를 낀 주치의가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와요. 어디가 문제인가요?"
"3일 전부터 갑작스레 두통도 있고, 뭔가 속도 메슥거려요. 무엇보다도 귀가 잘 안 들리고 멍멍해요."
"음… 증상이 며칠 정도 지속되었나요?"
"(응? 내가 얘기했던 것 같은데?) 대략 3일 전부터요."
이 순간부터였다. 친절한 눈빛의 그가 갑자기 세상 철없는 어린아이를 보는 표정과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건.
"오, mevrouw. 증상이 고작 며칠 지났을 뿐인데 벌써 저를 찾아온 건가요? 너무 빨리 왔네요.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지켜봤어야죠. 지금 단계에서 제가 해줄 건 없겠네요."
어이없는 표정으로 실의에 빠진 내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잠시 이윽고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펜을 잡고 종이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 종이를 내게 건네며 근처 드럭스토어에서 해당 제품을 구입하라고 했다. 기대에 차서 종이에 적혀있는 글씨를 읽어보았다.
'PARACETAMOL'
결국 돌고 돌아 네덜란드 의료진들이 가장 신뢰하는 그 진통제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네덜란드 의료 시스템의 핵심은 GP(General Practitioner, 가정의)다. 모든 의료 서비스는 이 GP를 거쳐야 한다. 전문의를 보려면 GP의 추천서가 필요하다. 처음엔 이 시스템이 너무 불편했고, 사실 지금도 불편하긴 하다.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와 수화기를 붙잡고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호소했다.
"그래도 너는 납득이 아주 가지 않는 처방은 아니네. 우리 아버지는 두통이 너무 심해서 GP한테 갔더니 똑같이 진통제 처방받았었거든? 나중에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뇌에 심한 대미지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었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한 상황이었대."
이후 다른 친구에게서 손가락 골절상에도 진통제 '파라세타몰'을 처방해 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문화적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이쯤 되면 이 나라 사람들은 정말 다른 철학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들에게는 자연 치유와 최소한의 약물 개입이라는 나름의 신념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바로는, 네덜란드 의료진들은 파라세타몰을 매우 신뢰한다. 편두통이 심해도 파라세타몰, 자전거 사고로 손가락이 골절됐는데도 X-ray 한 장 찍고 파라세타몰을 추천받는다. 이는 '최소한의 개입으로 자연 치유를 돕는다'는 철학에서 나온 것 같다. 약국 문화도 한국과 천지 차이다. 한국에선 처방전 한 장이면 온갖 종류의 약을 받을 수 있다. 감기약, 소화제, 진통제, 해열제, 항생제… 약봉지 두둑하게 챙겨 나오게 된다. 네덜란드는 처방전을 내밀기는커녕, 약 사진 보여주면서 드럭스토어 가서 사 먹으라고 하는 상황이 태반이다. 항생제 한 번 처방받는 건 정말이지 하늘의 별따기다. 한 번은 너무 아파서 항생제를 어떻게 구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냥 아프고 말았다.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약은 무척 제한적이다.
한국과 네덜란드의 의료 문화 차이를 보면 흥미롭다.
한국: 감기 기운 → 즉시 병원 → 링거 + 항생제 + 해열제 + "푹 쉬세요"
네덜란드: 감기 기운 → "집에서 일주일 더 쉰 후 지켜보세요" → 그래도 아프면 → "진통제 드세요"
두 시스템 모두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한국은 빠른 대응과 환자 안심 효과가 있는 반면, 네덜란드는 불필요한 의료 개입을 줄이고 자연 치유력을 믿는 철학이 있다.
한국에서 감기로 동네 병원에 가면 진찰료 5,100원에 약값 포함해서 1.5-2만 원 정도면 해결된다.(사실 이거보다 더 저렴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반면 네덜란드에서는 보험이 없다면 GP 상담 한 번에 30유로(약 5만 원)를 내야 하고, 보험이 있어도 연간 385유로(약 63만 원)의 자기 부담금 한도 내에서 본인이 지불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네덜란드에서 병원을 잘 안 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의료비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기본 의료보험료는 월 19만 원이고, 여기에 연간 63만 원의 본인부담금이 있어서 연간 291만 원 정도의 의료비가 든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이 정도 아픈 걸로 병원 갈까? 아니면 조금 더 지켜볼까?"
이런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결과적으로 정말 필요한 순간을 구분하는 안목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다.
네덜란드에서 6년을 살아보니 깨달은 게 있다. 이 나라에서 살면서 몸이 강해지기보다는, 마음이 강해진다는 것. 한국에서는 작은 몸살에도 바로 병원을 찾고, 각종 영양제와 건강식품으로 몸을 관리했다.
그런데도 늘 어딘가 아프고, 늘 불안했다. '혹시 큰 병은 아닐까?' 하는 건강에 대한 염려가 항상 있었던 것 같다.
네덜란드는 반대다. 웬만한 아픔은 참고 견딘다. 몸이 스스로 회복할 거라는 믿음을 갖는다.(혹은 자기세뇌를 하거나)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은 시간이 해결해 줬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무엇보다, 내 몸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예전에는 조금만 이상해도 "큰일 났다" 싶었는데, 이제는 "이틀정도는 지켜보지 뭐"하는 여유가 생겼다. 진통제 하나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진통제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네덜란드의 여름은 이 모든 고통에 대한 보상이다. 오후 9-10시까지 해가 떠있고, 새벽 5시면 벌써 환하다. 한여름엔 거의 18시간을 햇빛 아래서 보낼 수 있다. 겨울의 우울함을 견딘 보상처럼 느껴진다. 여름이 되면 사람들도 확연히 달라진다. 6개월간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활짝 펴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여름엔 병원 갈 일도 줄어든다. 햇빛을 충분히 받으니까 자연스럽게 몸이 건강해진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나라의 의료 문화는 각각 다른 철학을 담고 있다. 한국의 '적극적 치료와 빠른 대응'과 네덜란드의 '보수적 관찰과 자연 치유'.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각각 장단점이 있고, 그 사회의 문화와 맞물려 발달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건, 6년간 이 땅에서 살아내면서 나는 더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몸의 작은 신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고, 정말 필요한 순간을 구분하는 안목이 생겼다. 두 시스템을 모두 경험해 본 덕분에,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응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도 얻었다.
네덜란드의 겨울은 여전히 춥고 어둡다. 하지만 이제는 그 추위 속에서도 견뎌낼 수 있는 내면의 온도계가 생겼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두 문화에서 배운 가장 값진 면역력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