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의 뜻밖의 김치탐방기
(image by Nastya Dulhiier via unsplash)
유학 초창기의 나는 참 어설픈 요리실력을 자랑하는 일명 요린이였다. 어설픈 실력에 어설픈 재료들로 요리를 하니 맛있는 음식이 탄생할리는 만무했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외식할 장소라도 알아보면 보통 기본 인당 비용이 한국돈으로 30000원에 육박하는 데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케밥이나 샌드위치에도 거의 만원 돈을 태워야 하니, 한국에서 먹듯이 식당에서 제대로 한 끼를 먹으려면 최소 3일 치 식비(혹은 그 이상)에 가까운 돈을 태워야 했다. 가벼운 유학생 주머니에는 외식값은 너무나도 묵직했다. 향수병은 원래 음식으로 찾아오는 것인지 그렇게 몇 달간 가족과 친구들보다 엄마가 해준 음식들이 그리워하며 한국에서 가져온 레토르트를 한 개, 한 개 아껴가면서 먹었던 그런 시절이었더랬다.
타지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그리운 한국음식에 대해 많은 부분들을 포기하게 됨과 동시에, 창조력이 급상승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네덜란드 생활 초창기엔 한국에서 먹던 얼큰한 국물이나 김치 등이 그렇게 그리웠더랬다. 감자탕, 곱창구이, 순댓국, 엄마가 끓여준 얼큰하고 맛깔난 김치찌개까지. 한국에서는 흔하게 찾을 수 있던 음식들이 여기서는 사막에서 오아시스 찾기 수준으로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한식당은 주머니 가벼운 유학생이 자주 찾기는 부담스러웠다. 먹고 싶은 음식들을 다이어리에 차곡차곡 써 보았다. 문제의 원인을 발견할 필요가 있었다.
감자탕은 돼지뼈를 어디서 구해야 할지 (지금은 너무 잘 알지만), 곱창과 순대 같은 내장류는 구하기도 쉽지 않은데 혼자 주문하기는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진지하게 주변 한국 친구들을 모아 돼지 한 마리를 아예 돈 모아서 구매하면 어떨까, 도매업자를 찾아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도 해 보았다.
가장 큰 문제는 김치였다. 마트에서 파는 김치도 나름 신선하고 맛있었지만, 집에서 엄마가 해주던 그 쿰쿰하고 시큼하다 못해 짜릿한 그 맛의 김치를 찾는 건 불가했다.
이토록 한식을 먹는 것에 진심인 내가 머나먼 유럽땅을 유학지로 선정했다는 게 참으로 통탄스러운 일이었음에 한탄하며, 비장한 마음으로 동네에 자리한 슈퍼마켓 Albert Hijn으로 향했다. 김치를 직접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배추, 파, 양파, 마늘부터 차곡차곡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젠 양념이다. 가장 중요한 고춧가루는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 있었다. 사실 내가 챙긴 건 아니고, 엄마가 ‘고춧가루는 먹던 걸 먹어야 돼’라며 억지로 쑤셔 넣으시던 걸 무겁다며 인상 잔뜩 쓰고 가져온 것이나, 지금은 진정 어머님의 은혜는 그 끝이 없음을 뼈가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 가장 중요한 시큼 쿰쿰 털털의 요소를 만들어내는 것은 ‘발효’ 일 테다. 야채랑 고춧가루만 때려 넣는 것은 김치가 아니다. 액젓과 풀. 엄마의 김치를 재현하기 위해서 이 두 가지가 필수일 테니.
김치를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보니, 아시아마켓에 국가별로 진열되어 있는 피시소스로 액젓이 대체가 된다 했다. 막상 가서 보니 피시소스의 종류가 생각보다 다양했다. 오징어, 멸치(로 추정되는 작은 생선), 혹은 새우등을 첨가한 것으로 추정되는 피시소스가 종류별로 있으니 여기서 내 먹보로써의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태국 여행 갔을 때 길거리 노점에서 많이 본 듯한 라벨의 액젓이 눈에 띈다. 국민템엔 이유가 있으리라..라고 생각하며 장바구니에 담는다.
풀은 이미 'glutinous rice flour'를 물에 개서 끓이면 풀이된다는 얘기를 듣긴 했으나, 찬밥을 갈아서 사용해도 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에 집에 남은 찬밥을 활용하기로 한다. 그리고 계산대로 향하는 길에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영혼의 양식, '하링(haring)'이다.
차가운 겨울을 견디는 네덜란드의 청어
하링은 소금에 절인 청어를 발효시킨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간식이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broodjes'라고 쓰인 노점에서 종종 많이 팔기도 하고, 슈퍼마켓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 보통 빵에 하링을 올린 다음 그 위에 다진 생양파를 올려서 샌드위치처럼 먹은 방식(broodje haring)이 일반적이다. 혹은 꼬리째로 들어 올려 몸통부터 한 번에 먹는 경우도 있긴 한데, 보통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용으로 시도해 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방법을 시도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주위를 잘 살필 것! 지나가는 갈매기에게 통째로 뺏기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나도 뺏긴 적이 있는데, 갈매기라 읽고 하링 도둑이라 불러도 이질감이 없는 이 생물체는 하링이 입에 들어가는 직전, 바로 그 순간(!)을 귀신같이 포착해서 탈취해가곤 한다. 자칫하면 하링의 맛을 보기도 전에 딱히 즐거울 리 없는 갈매기와의 딱딱한 부리맛키스를 보게 될 수도 있으니 반드시, 반드시 주의가 필요하다. 뭐 이 또한 즐거운 추억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나는 하링을 좋아한다. 청어 자체가 향이 없는 생선이 아니기에 절인 청어 음식인 하링은 더더욱 특유의 향이 있는 편이다. 이는 네덜란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 음식에 호불호가 심하게 나뉘어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선회를 좋아하는 나에게 하링은 간혹 기름진 회가 당기는 날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즐기기 좋은 음식이다. 특히 철분 부족한 어지러움증이 그날, 기름지고 고소한, 살이 통통하게 오른 청어를 슈퍼마켓, 혹은 생선가게에서 구입한 다음 날양파와 곁들여서 소금을 살짝 뿌려 빵과 곁들여 먹으면 나에게는 이만한 특효약이 없기도 했다.(가끔 소주가 당기는 건 안 비밀이다)
특히 5-7월 사이에 잡힌 청어는 지방함량이 가장 높다 하여 이런 하링을 'nieuwe haring'이라고 따로 칭하는 명칭이 있을 정도다. 하링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시즌은 절대 놓칠 수 없는 풍요의 시즌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길게 haring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별 거 없다. 그날 나는 그저 김치재료 수집과정 중에 찾은 이 사랑스러운 생선을 기꺼이 내 김치파티의 게스트로 초대하기로 한 것일 뿐.
'발효'라는 거대한 숙제를 풀기 위해 배추와 고춧가루, 그리고 피시 소스까지 준비한 이 날, 내 머릿속의 창조 회로에 발동이 걸리고 말았다. 문득 어릴 적 엄마가 가끔씩 신선한 갈치를 넣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김치를 먹을 때마다 톡톡 씹히는 갈치살이 별미였고, 김치가 어느 정도 곰삭고 나면 스르륵 녹아버려서 감칠맛을 끌어올리는 이 김치를 나는 정말 사랑했다. 대신 정말 신선한 갈치를 구하기 쉽지 않았는지(그도 아니면 혹시 어머니가 귀찮으셨던 건지), 못 먹어 본 지 어언 백만 년은 된 것 같지만.
'액젓 대신 피시 소스를 썼다면, 발효된 청어를 쓰는 것도 엄마의 갈치김치 스타일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네덜란드 현지 재료와 한국식 발효의 극적인 만남이라는 게 이런 거 아니겠는가. 어차피 망해도 내가 먹을 음식인데 싶어, 나는 김치재료를 사러 간 슈퍼마켓에서 바로 신선해 보이는 하링을 몇 팩 집어 들었다. 그리곤 그 쿰쿰하고 짜릿한 맛을 내는 엄마표 김치에 대한 염원을 담아, 내가 버무린 배춧잎 사이사이에 청어살을 살포시 박아 넣었다. 순대, 곱창을 먹기 위해 돼지 한 마리를 사야 하나 고민하던 내게 이제 네덜란드 청어를 김치에 박아 넣는 정도는 점잖은 수준이지 않나.
결과는 내 기준에선 대성공이었다. 하링의 기름지고 고소한 풍미와 절여진 짭조름함이 액젓과 만나 극도의 감칠맛을 폭발시켰고, 며칠 뒤 쿰쿰하게 익은 김치에서는 엄마의 김치에서만 맡을 수 있었던 그 시큼하고 짜릿한 발효의 냄새가 진동했다. 비록 그 맛이 엄마의 맛깔난 김치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이 먼 타국에서 나만의 그리움이 담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김치가 삭아가는 것은 고향의 그리움과 함께 삭혀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