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모가지를 거두어들인 사연
가을비가 내려서 집안 공기가 부쩍 서늘해졌다. 아침에 여름 내내 입고 있었던 빨간 티셔츠 - 남편이 11년 전에 나이키 런에 참가했을 때 받아왔다. 2011년이라고 찍혀 있다. - 위에 곤색 바람막이를 꺼내서 덧입었다. 점심 무렵에는 얇은 칠부 파자마 바지로는 살짝 추워서 간절기에 입는 조금 더 톡톡한 회색 긴바지로 갈아입었다.
분명 몇 달 만에 처음 꺼낸 옷들인데, 하나하나 장착하고 나니 딱 그냥 익숙한 그 패션 그대로다. 위아래 색깔도, 소재도 제멋대로. 누가 찾아온다면 부끄러워질 것 같은, '아. 나 집에서 입을 옷 좀 살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복장이다.
그래 놓고는 아마 또 잊어버리고 이 복장으로 최소 몇 년은 살게 될 것이다. 남편 옷을 정리하다가 안 입는 옷을 하나 내 것으로 삼거나, 엄마가 어디선가 집에서 입는 알록달록한 바지를 하나 사다 줄 때까지. 오늘 이 익숙한 봄가을 집안 룩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면서 ‘나도 참 나답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누구에게나 삶의 패턴이라는 것이 생긴다. 조금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다가도 자석에 이끌리듯 제자리로 돌아가기 일쑤다. 나의 경우는 모델하우스 같은 집을 보고 와서는, 우리도 한번 깨끗하게 살아보자 싶어서 유난을 떨며 싹 정리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느새 식탁 위에는 다시 갖가지 물건이 널렸고, 밥을 먹을 때면 그것들을 슬슬 옆으로 밀어서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언젠가 편한 신발을 사러 갔다가 너무 예뻐서 사지 않을 수 없었던 굽 있는 구두는 두 번 정도 햇빛을 본 채로 계속 신발장 속에 처박혀 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대부분 그 끝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그것을 잘 알기에 더욱 내가 익숙한 것, 편안한 것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점점 더 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의미 없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년 가까이 소파와 핸드폰과 삼위일체의 삶을 살던 남편이 어제부터 블로그를 열어보겠다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아들이 학교를 가고 둘이 카페에 가면 나는 글을 쓰고 남편은 그 시간 내내 유튜브를 보거나 게임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제는 내 옆에서 내내 글을 썼다. 기록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생각과 감정들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의 인생에서 비춰보면 정말 놀라운 시도였다.
남편의 '안 하던 짓'의 결말은 과연 자석에 이끌려 다시 소파와 하나가 되는 것일까, 아니면 블로거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열게 되는 것일까. 조심스럽게 가 아니라 확실하게, 나는 전자에 나의 오른쪽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그러나 그로서는 워낙 이례적인 시도를 무한히 응원하는 마음으로 손모가지는 거두어들이고, 후자에 500원을 걸어본다. 남편 미안.
설령 자석에 이끌려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욕망이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반가운 일이다. 비슷비슷한 하루에 두근거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까.
나와 남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안 하던 짓을 시도해 보기를. 거기에 더해서 그 결말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너무 평범해서 예측 가능해 보이는 우리의 삶에 생각지 못했던 여러 가지 변주가 울려 퍼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