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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솜사탕 Oct 08. 2022

마당 있는 집을 꿈꾼 자의 현실


결혼 전 직장을 다닐 무렵, 저가항공사들이 막 생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해외만큼 멀리 있는 것 같았던 제주도가 훨씬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무엇이든 혼자서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딱 적당한 여행지였다. 항공권을 바지런하게 미리 예약해 두고,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하면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훌쩍 짧은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는 계절에 짐을 가볍게 꾸려서 올레길을 두, 세 코스 정도 걷고 전복죽을 먹고 고기 국수도 사 먹으면 그것은 완벽한 휴식이었다.



그런 여행을 떠났던 어느 계절이었다. 몇 번째 코스를 걸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하루 종일 올레길을 걷다가 예약해 둔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작은 집 세 개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한 집이 세 개의 객실과 공용 욕실이 있는 게스트 동이었다. 내가 머물 방은 싱글 침대가 하나 놓여있는 공간이 거의 전부이다시피 한 작은방이었지만, 지친 몸을 누이기에는 충분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쉴 수 있는 깨끗하고 안전한 공간이 주어지는 것은 나 홀로 여행에서는 호사로운 일이었다.



만날 사람도, 할 일도 없는 밤. 책 한 권을 들고 집 밖으로 살며시 나가보았다. 시골 마을에는 깜깜한 어둠이 내려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의 노란 조명이 마당을 밝히고 투숙객이 이용할 수 있는 작은 카페의 창문에 걸린 알전구만 조용히 깜빡이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밤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그것도 지겨워질 때쯤 목조로 지어진 카페 2층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머물고 있다는 약간의 긴장감, 혼자서도 씩씩하게 작은 모험을 하고 있다는 약간의 설렘에 책에 쉽게 빠져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새벽에 눈을 떠 마당으로 나와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지난밤 센티함의 여운이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그 순간 마음 가득 충만함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땅을 밟고, 하늘을 보면서 살아야겠다. 정말로.'


평생 아파트에서 살아온 나는 두 발이 허공에 뜬 채 땅과 뚝 떨어져서 살아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며, 두 발로 단단하게 땅을 밟고 있는 그 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날 처음으로 나라는 존재는 만물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 강렬했던 찰나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낸 하루는, 언젠가 꼭 마당이 있는 낮은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로망을 가슴 깊이 심어주었다.




그날의 기억은 꽤 오랫동안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기에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으로만 뭉게뭉게 꿈을 피워 올렸다. 주택에서 살면서, 마당에 꽃을 심고, 작은 텃밭을 일구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아이는 그 곁에서 뛰어놀고, 바비큐 파티를 하겠지. 여름밤에는 돗자리를 깔고 모기향을 피워두고 드러누워서 뒹굴뒹굴 별을 봐야지.



그런데 강릉행이 결정되면서 그 꿈이 생각보다 빨리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살게 된 것이다! 이제 정말로, 땅을 밟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겠구나!! 그렇게 로망 실현 어가 된 지 8개월이 되어간다. 그 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살아보니... 주택에서의 삶은 꿈꾸었던 것과 살짝 다르기는 하다. 모든 주택에 텃밭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집 가장자리에 심어둔 상추 모종들은 뜨거운 여름 햇살에 타들어가버렸다. 꽃은 심어 놓으면 며칠 있다가 금방 시들어버린다. 잔디와 잡초는 겨울이 되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라며 그냥 두었더니, 이웃들 보기에 민망스러운 상태에 이르기도 했다. 여름밤에 바깥에 환하게 불을 켜 두면 온갖 날벌레들이 날아들어오기 때문에 집 안으로 피신하기 바쁘다. 아들은 주로 집 안에서 논다.



그렇다. 생각했던 것과 약간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시각각 하늘의 모습이 변하는 것, 하루하루 나무의 색이 바뀌는 것을 보며 살아가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다시는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마당이 있는 낮은 집에서 살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그랬다.

10월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10월 8일. 살짝 그 마음이 흔들린다.



그 이유는, 너무 춥다.


이미 한겨울 복장을 하고 있다. 지금도 극세사 잠옷에 패딩조끼를 입고, 목에는 손수건을 두른 채 글을 쓰고 있다. 난방비 폭탄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기에, 일단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난방 버튼을 누르는 것을 미루어보려고 했는데... 실내 온도는 계속 내려간다. 갑자기 훈훈한 아파트가 그리워진다.아하하



혹시 마당을 품은 낮은 집에 대한 로망을 품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이 점을 추가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마당을 품은, 낮고, 단열이 잘 되어 있는 집이어야 한다고.



공주가 등장하는 동화으레 왕자님과 공주님이 결혼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만약 그 후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져도 여전히 동화일 수 있을까? 필자가 15년 전에 품었던 꿈은 꽤 멋지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므로  그 꿈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현실이 이어진다. 마당을 꿈꾸었던 이는 온몸을 꽁꽁 싸매고 창밖으로 보이는 햇살에 감탄하며 글을 쓰고 있다.



간절했던 꿈을 이루고 나더라도, 그 후의 삶은 장밋빛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 기적 같은 순간 이후에도 생활은 이어진다는 것. 꿈꾸었던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럼에도 충분히 꿈꿀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을 끝내면 집 안은 추우니 오랜만에 난 햇살을 한껏 맞으러 마당으로 나가봐야겠다. 긴 한글날 연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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