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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솜사탕 Aug 24. 2022

은퇴 이후, 어떻게 놀 것인가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백수가 될 운명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말장난인가 했는데, 두고두고 무릎을 치면서 공감하는 말 중 하나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백수들은 직장 다니는 사람들 만큼이나 일정이 빼곡하다. 일과를 채우는 방식이나 내용은 각자 다르겠지만. 백수가 바쁜 이유 중 하나는, (나 같은 경우는) 사회적으로 본인의 가치를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나름 무척 애쓰기 때문인 것 같다. 



40대 초반의 나이에 은퇴를 했다. 조금 빠른 은퇴를 한 것은 팍팍한 경쟁 사회 속에서 인간관계에 치이고 성과를 만드는데 지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일을 벗어던지고 나면 마음껏 여유로움을 누리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게으름과 나태는 죄악이라고 세뇌받으며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 아. 무. 것. 도 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사람 성향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내 안에 감독관이 끊임없이 ‘너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야?’라는 눈치 아닌 눈치를 준다. 남들은 일하러 나간 시간, 유난히 몸이 무거운 날,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들고 의미 없는 페이지를 넘기며 뭉그적거리다 느지막이 몸을 일으키면 하루를 몽땅 날려먹은 기분이 든다. 차라리 낮잠이나 잘걸. 그럼 머리라도 맑아졌을 텐데.



이와 같은 찜찜한 뒷맛을 몇 번 경험한 후로, 조금씩 이것저것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를 구속할만한 장치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블로그와 글쓰기는 단연 하루를 잡아먹는 귀신(?)이었다. 글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리고, 거기다가 글감이 없는 날은 영감을 찾기 위해 한두 시간은 더 헤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렇게 낑낑거린 끝에 ‘발행’ 버튼을 누르고 나면, 고단함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어려운 과제를 해낸듯한 뿌듯함에 오히려 한층 마음이 가벼워졌다.



글이 쌓여가고 내 글에 대한 이웃들의 반응을 보면서 더욱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니 좋은 책도 읽어야 했다. 블로그를 하다 보니 브런치도 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최근에는 브런치에도 글을 쓰고 있다. 꾸준히 글을 쓰려면 체력이 있어야 하니 운동도 시작했다.  그 사이에 집안일을 하고, 아이가 하교하면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니, 백수의 하루는 24시간이 짧을 정도로 빼곡해졌다.



내가 요즘처럼 열심히 산 적이 있었던가…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한 적이 있었던가. 학교 다닐 때는 물론 열심히 공부하긴 했지만, 시험이 끝나면 그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실컷 나가 놀았다. 직장을 다닐 무렵에는 퇴근 후나 쉬는 날은 어김없이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다른 일은 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백수가 된 이후 어떤 강제성도 없음에도 끊임없이 이것저것을 쓰고, 읽고, 만들어 내는 것은 나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그것도 즐겁게. 신바람 나게 하고 있다. 저질체력에 의지박약 하던 내가 빡쎄게 놀고 있다.



비어있는 시간이 처음 생겼을 때, 처음부터 뚝딱뚝딱 뭔가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백수 1년 차에는 누군가를 만나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다니고, 낮잠 한숨 자고 나면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어느새 아들이 올 시간이었다. 그런데 2년 차가 되고, 강릉으로 이사를 오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그것을 함으로써 내 삶이 더 나아진다고 느끼기 시작하고부터 그것이 조금씩 다른 영역으로까지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시도하고 싶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깊이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겼다.



책을 발간하는 꿈을 꾸게 되었고,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본격적으로 그림도 그려보고 싶다. 사실 어떤 것도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하던 것들이다.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유용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고  불필요하게 외부로 소모되는 에너지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설령 지금까지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좋아하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크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삶을 움직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것이 글쓰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사람에 따라서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백수가 될 운명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생업을 놓게 된다. 

그때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놀 것인가. 



미리 계획을 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지만 있으면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세상으로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필자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어쩔 수 없이 직장일을 하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기에.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놓아도,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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