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을 읽었다. 잘나가는 경제인이었던 스웨덴인 저자는 돌연 태국으로 날아가 숲속 승려가 된다. 그리고 잠은 숲에서 자고, 밥은 인근 마을에서 걸식을 하며 수행하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다. 승려의 삶을 산 지 17년째가 되는 해, 이제는 돌아가야겠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수행 생활을 정리한다.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와 출가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환속 후 그는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보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명상을 가르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도 한다. 그렇게 속세의 삶에 안착하게 되었을 즈음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을 맞닥뜨린다. 아직 50대에 불과한 그의 나이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곧 점점 병이 진행되어 차례차례 온몸의 근육이 마비될 것이라는 것, 곧 걷는 것도 작은 물건을 드는 것조차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호흡에 관여하는 근육마저 마비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이 그려왔던 미래는 마주할 수 없을 것을 의미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절망이 글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책을 쓴다. 이곳에서 더 살아갈 이들에게 ‘죽음 뒤에 사라질 그 모든 것을 내려놓거나 적어도 살짝만 쥐고 살아가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편안하게 삶을 마감한다.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죽음’을 수용한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보낸 17년의 치열한 수행의 시간이 곧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살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맞닥뜨리게 되는 일이 있고, 내가 원한다고 해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있다. 멀쩡히 잘 걸어가다가 다음 순간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열심히 쌓아올린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기도 한다. 너무나 사랑하는 존재를 보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을 ‘수용’ 해야 한다.
그것이 최선이다.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그 상황이 일어나지 않았기를 바라고 운명을 저주하는 것은 괴로움을 연장시킬 뿐이다. 힘들지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러면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로 넘어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빨리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몰아치는 감정을 뒤로하고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이렇게 삶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까지도 없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나는 ‘수용’이참 서툴다.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스치는 내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밀어낸다. 그것들은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 지금 내 앞에 벌어진 작은 일, 성에 차지 않는 나의 모습까지도 포함한다. ‘왜 이 사람은 지금 그렇게 말을 하지?’, ‘저 차가 저기서 안 나타났으면 부딪히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꼭 일찍 일어나서 그 일을 했어야 했는데. 했는데.’ 하며 끊임없이 머릿속의 테이프를 되감는다. 그러면서 남을 탓하거나, 나를 자책하기 바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음에도.
실은 어제 오후에 작은 갈등이 있었던 상대를 마음속으로 수없이 미워하고 원망했다. 생각 속에서 그 일은 더욱 부풀려졌고 앞으로에 대한 걱정이 쌓였다. 밤에는 너무나 잘 쓰인 글을 읽으면서, 내 글을 떠올렸다. 아직 얼마나 부족한지를 떠올리며 좌절했다. 작가가 오랫동안 글을 써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그 시간을 뛰어넘고 싶었다. ‘지금 바로’ 이런 글을 쓰고 싶었다. 나도 내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의 회로는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인생에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과, 일들 그리고 나를 있는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편안해질까 생각해 본다. 그와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금 더 삶을 가볍고 지혜롭게 살아가고 싶은 나는, ‘수용’을 익혀야 한다. 의미 없는 것을 원망하고 탓하느라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로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도 숲속 승려의 17년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평생 안고 가며 연습해야 할 화두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매 순간 바짝 힘을 주며 꼭 쥐는 두 주먹을 풀고 또 풀 것을 다짐한다.
저는 여러분이 손을 조금 덜 세게 쥐고 더 활짝 편 상태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조금 덜 통제하고 더 신뢰하길 바랍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는 압박을 조금 덜 느끼고,
삶을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