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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솜사탕 Oct 17. 2022

나의 속도대로 살아가고 있나요?


9월 중순에 수영을 시작하고 꼭 한 달이 지났다. 등록을 하며 9월까지는 절대 수업에 빠지지 않겠다고 자신과 약속을 했지만, 매일 아침 일어나는 순간부터 고민이 시작되었다. 갈까, 가지 말까, 가야지, 그런데 너무 피곤하다ㅠㅠ 수영장에 갈 수 없는 온갖 합당한 이유들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그래도 끝내 '죽더라도 수영장에서 죽자'라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을 나서고 있다.



 수업 첫날에는 수강생들의 맨 뒤에 섰지만, 과거에 수영을 몇 번 배운 덕에 조금씩 자리가 앞으로 옮겨졌다. 초반에는 강사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버거워서 혼이 쏙 빠졌었지만 이제는 조금 여유가 생겨, 매캐한 물을 가르며 몸이 미끄러져 나가는 감각을 느낀다. 더 세게 발차기를 하고, 팔을 조금 더 길게 뻗어보며 내 몸이 나아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사실 수영을 하다 보면, 절대적으로 내가 얼마나 속도가 붙고 체력이 좋아졌는지는 알기가 어렵다. 그보다는, 내 앞에 있는 사람과의 간격을 보며 내 실력을 가늠하곤 한다. 앞사람이 저만치 앞서가면 조바심이 나고, 둘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면, '오 나 좀 하나 본데??' 하고 으쓱해진다. 앞에 아주 잘 하는 사람이 서면 아예 포기해 버리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면 간격이 벌어지지 않게 이 악물고 따르기도 한다. 가끔 나보다 실력이 부족해 보였던 사람이 뒤에서 바짝 붙어 오고 있으면, 헉헉거리면서도 다리에 힘을 풀 수가 없다.



실제 나의 실력보다는, 다른 사람에 빗대어서 이 정도면 괜찮은지, 아직 멀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매일 꾸준히 하고 있으니, 근력과 체력이 붙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점점 실력은 나아질 것이다. 앞에 누가 오든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그때그때 앞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절망하기도 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한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각자의 출발선과 목표는 다른 것이니, 욕심을 내려놓고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삶의 방향은 제각각이고, 우리는 각자의 정상을 향해 갈 뿐이라고. 



그런데 실생활에서는 이런 멋진 문구들이 무색하다. 내가 아무리 많이 올라왔더라도 훨씬 앞에 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고 초라해진다. 그런데 우리 앞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므로 우리의 목표는 언제부터인가 정상이 아니라 나보다 앞서가는 저 사람으로 바뀐다. 



그것을 잘 시사하는 것이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인 것 같다. 선수가 지치지 않고 자신의 기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함께 달려주는 사람. 선수들은 그를 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속도를 조절하며 끝까지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삶이라는 긴 과정에서, 멀리 있는 결승점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타인을 곁눈질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내게도 그런 페이스메이커가 있다.  1년 정도 먼저 글을 쓰기 시작한 대학 동기이다. 학교 다닐 때부터 남달리 똑똑하던 그 친구는 글을 쓴 지 오래지 않아 종이책 전자책을 출간하며 빠르게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며 글쓰기를 시작했으니 그가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따라잡을 재간이 없다. 나에겐 너무 빠른 페이스메이커^^  그래서 더 열심히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절대적인 양이나 수준보다는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인 적고 많음에서 훨씬 큰 만족감과, 절망감을 맛본다. 머리로는 지금에 감사하고, 과정을 즐기고, 나만의 속도로 가자고 애써 마음을 단도리 하지만, 힐끗힐끗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질긴 까르마가 종종 쓰디쓴 괴로움을 안겨주긴 하지만 과히 탓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그만 서버리고 싶어도 발차기를 멈추지 않고 꾸역꾸역 한 바퀴를 더 돌 수 있도록, 왠지 아쉬운 글을 그냥 발행하지 않고 마지막 한 문장을 더 보탤 수 있도록, 내 안에서 최후 한 줌의 힘을 끌어내주기 때문일 것이다. 탕약을 짜내며 마지막으로 있는 힘껏 면보를 꽈악 비틀듯이. 


나만의 속도는 타인의 속도를 빌어 만들어지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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