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배운 것 중 나쁜 것은 따라하기 쉽고 가장 좋은 것은 알아보는 능력
닮고 싶은 롤모델이 딱히 없었다. 기준이 될 '나'도 뚜렷하지 않았으니 그저 '무엇'을 갖는 삶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떻게' 또는 '왜' 사는가에 대한 문장이 내게 다가왔다. 문득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실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주변에 단 한 사람이라도 믿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아이는 잘 자라난다고 한다. 내게 외할머니는 그런 존재였다. 멀리 있거나 책에 있는 인물 보다 실제 삶으로 나를 관여한 외할머니가 훨씬 희망적이었다.
사람은 직접 보고 배운 것 중 나쁜 것은 따라하기 쉽고 가장 좋은 것은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 모르면 몰랐지, 본 중 가장 좋은 외할머니의 모습이 나의 모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자책과 비교 비난이 가득한 실제 나와의 간극이 커 그렇게 괴로웠나 보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놀러와 계시는 2~3일은 천국이었다. 그동안은 아버지도 날카로운 발톱을 숨기고 순한 양이 되었다. 밖에서 놀고 있으면 동네 어귀에서 나타난 외할머니는 부모에게서 볼 수 없는 할머니만의 사랑의 눈빛을 내게 보내주셨다. 그러고선 동네 넓직한 계단에 앉아 계신 나의 친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말년까지도 얼굴에 걱정, 고통이 가득한 친할머니 앞에 함께 앉아 따스한 눈빛으로 안부를 주고 받은 후 손을 꼭 잡고 통성기도를 해주셨다.
부모와 거리두기 후 마음이 심해로 가라앉은 나날, 넋두리 식으로 외할머니를 의심,원망하기도 했다.
엄마의 언어와 태도는 누구한테 배웠던 것일까.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사람의 정성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꼭 한 사람만의 영향은 아닐테고 형제, 친구, 학교 등 한국 문화에서 경험했던 총합이 오늘날의 내가 될 것이다. 그러니 엄마의 우주와 나의 우주가 다르다.
할머닌 내가 30세에 이를 때 까지 살포시 왔다 간 천사였지만 이전의 삶은 마냥 평안하지만은 않았다.
전래동화처럼 멀게 느껴졌던 할머니 과거사는 불혹이 되서야 피부로 다가왔다. 외할머니는 자녀 5남매에게 제각각 다른 어머니이기도 했다. 장남,장녀, 둘째 이모가 외할머니를 회상하기를 엄격하신 분이라 여겼고 막내라인 나의 엄마와 외삼촌은 친근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라 했다. 특히, 뭐든 솜씨가 좋아 살림밑천 노릇을 한 둘째 이모는 외할머니를 가장 사랑하면서도 평생을 서운했다. 나의 엄마는 따스함을 느꼈지만 언니 오빠에게 하는 엄격한 언어가 귀로 들어왔을 지도 모르겠다. 출생 순서에 따른 성격 형성에 대해 말한 김지윤 소장도 매체에 나와 말했지. 사회생활을 하다가 자기 주장이 강하고 억울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거든 혹시 '중간에 끼인 둘째'냐고 물어보고, 그렇다고 하면 깊은 공감을 건네라는 재밌는 말이 떠올랐다.
28년생 외할머니는 그 옛날 장녀에 여자인데도 어머니가 유치원에 3년을 보낼 만큼 기대가 컸디고 했다.
전쟁 중에는 막내 동생과 가족같은 지인을 잃어버렸다. 죽음의 두려움과 가족을 잃은 K장녀로서 죄책감과 고통은 엄청났을 것이다. (할머니가 되서야 막내동생을 찾았다) 휴전 후 종갓집 장손 외할아버지와 서울에 올라가 자녀 5남매를 낳고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나 추구했고 움켜쥐었던 젊은 날의 욕망 만큼이나 크나큰 고통이 찾아왔다. 외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간병을 하면서도 시어머니를 모심과 동시에 5남매도 길러야 했다. 은행도 없던 시절 계주는 큰 돈을 들고 도망갔고 운영하던 사업장들은 하나둘씩 넘어갔다.물질만을 추구하며 따랐던 주변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할머닌 감당하고 책임져야 할 삶이 너무 버거운 나머지 미쳐서 헛소리를 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찾아가 깽판을 치셨으니 동네 사람들은 악귀가 씌였다고 했다. 죽지 못하여 차라리 미치는 것을 택했다. 학창시절의 엄마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듣고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나'로 살아오지 못한 K장녀 할머니에게 머물던 욕망과 현실과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동생들을 건사하고도 모자라 책임져야 할 자녀들과 몸져 누운 남편 앞에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럴려고 그런게 아니고, 인생 굴곡에 터닝포인트가 되는 기회를 맞이하려고 한게 아니라 마지막 트리거에 의해 터져버린 것이다.
막 직장인이 되어 사택으로 출가 한 큰이모의 부축으로 목사님을 찾아다니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체험한 할머니는 그때부터 치유의 길이 열렸다. 그 길도 다사다난 했지만 하나님의 비전을 확신하고 계속해서 나아가 공부했고 결국 내가 아는 외할머니로 거듭나셨다. 그냥 얻어진 평안함이 아니었다.
28년생 외할머니는 향년 86세로 지병도 없이 정도 안 떼고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일요일 아침 단 몇 시간 만에 맞이한 죽음마저 내게 롤모델이 되었다. 전날 밤 12시까지 증손주의 옷을 짓고 피아노 뚜껑 위에 올려두고 밤잠에 드셨다. 우리집 냉장고에는 할머니가 3주 전 놀러오셔서 만든 김치도 남아 있었다. 믿기지 않았다. 1주일 전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 꿈에 나타나는 것으로 죽음을 예견하셔서 그렇게 바빴나 보다. 가신 지 6일 째 되던 날, 내 꿈에도 나오셔서 한동안 내 곁에 머무르셨다.
갑작스러운 슬픔을 애도하기 위해 외할머니 회고록이 집필되었다. 자녀와 손주들의 편지에는 저마다 외할머니를 제일 닮았고 가장 사랑받은 자식이라 믿고 선전했다. 평소 쓰고 계셨던 글과 좋은 문장들을 담은 삶의 지침서도 책에 담겼다. 예전이는 이런 지혜의 말들이 주의 깊게 읽히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어 보니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짚어 읽어내려갔다.
글은 소제목과 짧은 내용의 반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돈이 생기면 우선 책을 사라는 말, 지식은 도구가 되고 지혜는 도구를 쓰는 방법을 아는 것, 사랑의 힘에 대한 글, 산책과 명상 호흡, 섬기는 사람이란, 교만, 좋아하는 일, 귀는 언제나 열려있고 입은 닫도록 되어 있다는 말. 정서 지능이 높은 사람, 잠자리를 개끗이 마련하라는 말, 전문가들이 말하는 발의 해부학적 구조와 뼈 개수 등 발 건강 관리 법, 남을 헐뜯는 사람, 자아 실현의 길, 뇌세포와 기억력을 위한 음식,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지혜, 톨스토이의 말,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글, 유대의 속담, 자기 자랑하는 사람은 내용이 없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과 같아 간접이든 직접이든 일체 삼가라는 말,걱정을 왜 하나, 여성은 노예에서 주인으로 변화하는 시대가 찾아왔다는 말. 정신적으로 건강한 노인 교육의 필요성, 결혼이란 어딘가 부족한 남자와 뭔가 모자라는 여자가 만나 공백을 서로 메꾸어 가는 것이고 나쁜 인연이란 없다는 글 등 책을 읽지 않는 자녀들을 위한 지침서를 마련하던 중이셨다.
만약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아이들과 내 삶에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대화를 요청했을까 싶다.
지금은 어르신들에게 유튜브도 있고 짧은 정보를 얻을 기회가 많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다독, 성경, 심리상담 봉사, 선교 봉사 등 삶의 통찰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늙어 갔다. 내 침대에 올라 주무시기 전까지 굽어서 힘든 등과 시린 눈으로 새벽까지 독서를 하다가 잠드셨다. 외할머니는 자녀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방법에 있어서도 지혜로웠다. 그런 처세술 학원을 다녔나 싶었는데 할머니는 책에 지혜를 실제 삶에 적용하는 실천주의자였다. 아침 루틴은 항상 같았다. 기상 후 내용이 들리도록 나와 가족을 위한 통성기도를 하셨고 스트레칭을 한 후 산책을 나가셨다가 돌어오셨다.
한번은 밤거리에 한 남학생을 둘러싸 괴롭히는 학생들을 보고 힐머니가 가방을 던져 도망가게 한 사건이 있었다.
나 같으면 뒤에서 몰래 경찰에 신고했을텐데 천국을 보장받은 할머니에게 두려울 게 없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서운함이 늘어날텐데 할머니의 입에서는 불안의 말 보다 타인의 마음을 배려하는 말이 전부였다. 외할머니는 자신을 사랑했던 만큼 타인을 사랑했고 이롭게 하는 사람이었다.
돌아가시기 3주 전 어느 날이다.
우리집에 놀러와 계셨던 할머니는 교회로, 나는 나의 목적지를 향하기 위해 마을버스 정류장에 섰다.
벤치에 앉은 사랑스러운 할머니의 백발 머리칼부터 발끝까지 훑어 보았다. 마치 사귄지 백일 밖에 안된 남자친구를 바라보듯 말이다.
"할머니 두꺼운 성경책 안 가지고 다니시네요?"
"성경 앱이 있는데 뭘~."
86세 권사님은 3개월 전 최초로 장만한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를 하고 스마트폰을 끄셨다. 교회와 할머니의 대형 성경책이 있고 가방 속에는 읽고 계시는 작은 서적이 항상 바뀌었다.
앱이 있더라도 성경책을 꼭 가지고 다니라는 교회 어르신들의 잔소리가 있는데 할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성경을 보는 자세보다 실제 말씀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뒤엣말을 붙이지 않은 '말'보다 오직 '행동'으로만 보여주셨다.
자녀에 관한 한 부모가 무능해야 한다는 박우란 박사의 말에 적합하지만 참 무색하기도 한 외할머니는 삶의 태도로서 자녀들 앞에 우뚝 섰다. 의도가 좋았다 한들 부작용도 있었다. 나의 엄마는 장녀인 내게 28년생 외할머니표 K장녀 역할을 들이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할머니의 후반기 인생은 다른 누구의 삶이 아닌 자신만의 삶을 사는데 열중했다. 그러고 나니 채워진 내면의 힘으로 타인을 사랑했다. 외할머니의 타고난 인정욕구와 실질적 지혜, 지식, 영혼이 결합되어 불어 온 나비효과는 자녀들의 삶에 필연적 고난을 버티게 해주는 훈풍이 되어주셨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어렸다. 거울에 비춰진 애쓴 나의 미소가 아닌 내면으로부터 올라 온 빛이다. 할머니가 내게 주셨던 손길처럼 자연스레 백발 머리칼을 쓸어 넘기니 따스한 온기가 남아있는 듯 부드러웠다.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던 롤모델은 죽음 후에도 남아있는 할머니의 평안한 얼굴이었다.
우측 페이지)
《논어》 공자
나는 15세가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十有五而志于學)
30세에 학문의 기초를 확립했다(三十而立)
40세가 되어서는 미혹하지 않았고(四十而不惑)
50세에는 하늘의 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
60세에는 남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고(六十而耳順)
70세에 이르러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