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은 '나'라는 뜻 이래. 나 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는 거지.
사회 곳곳의 폭력은 자신을 구출할 수 없었던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시작은 원가정인 경우가 많다. 초기 골든시기에 실패한 애착형성은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비웃을 만큼 평생을 좌지우지한다. 가족관계, 연인 사이, 직장 내 괴롭힘, 군대 등 가까운 관계에서 상당 부분 일어난다. 개인적이고 작은 불행을 견뎌내는 것이 미덕이라고 부추길수록 가장 작은 약자의 희생이 늘어난다. 그 희생자는 역시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 내 어린 생명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보호 할 최소한의 공격성 마저 억눌린 이들의 삶은 잔혹 동화 그 자체다.
(보건소에서 재깍재깍 보내오는 예방접종 스케줄 수첩, 가이드, 문자처럼 나라차원에서 공무원 주관 아기 있는 부모대상 애착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에서는 라푼젤을 딸 삼아 긴 머리를 빗겨주고 먹이고 재워 키운 마녀는 세상 밖은 두려운 곳이라고 말했다. 절대 나가선 안 된다는 수렴의 말 이면에는 마녀 자신의 욕망이 존재했다. 마녀 스스로도 라푼젤을 사랑한다고 믿었고 떠난 라푼젤에 대해 매우 슬프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현실을 분별한 라푼젤은 왕자님의 말을 통해 희망의 세상이 있음을 믿고 두려운 세상으로 몸을 던지는 용기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마녀는 라푼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기에 그런 라푼젤을 비난했고 복수를 꿈꿨다. 마녀의 속성은 우리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은 내 삶을 '나'로 살아갈 권한을 얻게 된다. 내면보다 물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좋아했다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자기애를 버리는 것은 자신을 파괴할 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틈은 세상에서 보내는 구원의 빛이 비집고 들어오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인생의 고통 속에 행복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듯이 악을 분별해야 선을 담아올 수 있다. 악을 아예 보지 못하게 원천봉쇄하는 것이 아닌 세상물정 속 가장 작은 악을 접할 때마다 부모가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은 채 슬며시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라고 미성년의 기간이 존재한다.
부모님은 기존 기조를 유지하는 게 여러모로 더 나았기에 나를 만나러 심해로 내려와 주진 않았지만 이해도 되었다. 그들에게 통제 밖은 여전히 위험하고 두려운 세상다. 회피 방어기제든 정면돌파든 현재의 '나'를 지탱할 수 있는 생존이 중요했다.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을 쓰고 행복을 연구하는 서은국 교수는 인간을 생존과 번식을 위하여 생물학적 기계라고 표현했다. 썩은 과일보다 신선하고 예쁜 과일을 선택하는 것을 '좋다'라고 생각하여 손을 뻗어 건강을 유지하듯 말이다. 인간은 그러나 인간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서 발전을 이룬데에는 고차원적인 지능을 가진 호모사피엔스는 감정을 이용하여 즐거움 느끼는 것은 명확한 상황, 즉 서로가 호의적인 환경 속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인간 개개인이 애쓰는 노력에는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할 지 모르지만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세계적으로 개인보다 가족 집단의 행복을 중요시 하는 나라일 수록 행복감이 낮다는 심리연구에 대해 말했다.
실제로 사회심리연구에서 가족을 중요시 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물으니 '돈'이라고 말했고 '개인주의'로 이루어진 미국에서는 '가족'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서은국 교수는 가족은 서로의 행복을 지지하고 서포트하는 역할이 되는 것이 가족의 기능을 다 한다고 했다. 한국만의 유교적 가족의 형식에 모든 사람들이 발맞춰 '개인의 모든 것을 다 취소하고 와!' 라는 등의 '의무와 책임'은 행복을 저해한다고 했다. 오히려 소소한 일상에서 마주하는 주변 사람들간의 따스함, 즐거움 등을 여러 번 누적시킨 것의 총합이 인간의 생존과 동시에 행복에 가깝다고 했다.
행복을 찾아 인생의 험난한 산을 오르는 중이라고 치자. 중간중간 길을 가로막은 도랑을 만났다.
넘어갈 수 있을 만한 종아리 근육과 무릎 연골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뛰어넘으면 3개월 정도는 다리를 쩔뚝거리겠지만 건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은 자신이 내린 판단이다. 그런데 넘기는 싫고 넘고도 싶은 혼란스러운 마음이 계속 된다면 그 속에 박혀 있는 나의 욕망이 무엇인지 따라가 보아야 한다. 나만의 도랑을 건널 때 수많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건너다 발을 헛디뎌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된다고.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넘어도 된다. 당연한 말이 뭐가 그렇게 어랴웠을까. 건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남의 손가락질과 질책은 허상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이 삶의 고통을 잊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오물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넘어야 할 도랑이 또다시 닥칠 때 마음챙김의 나날들을 떠올릴 것이다. 온전한 나로서 내 삶을 꾸려나가는 결심은 슬픈 일이 아니다. 행복한 일이다. 축하받을 일이다.
여러 겹의 마음 챙김을 통해 내 안에 괴로움들이 많이 배출된 기분이 들었다.
충만해지기도 했지만 죄책감이 드는건 당연했다. 결코 잘못된 감정이 아니다. 오랫동안 부정성에 머무름으로써 부정성을 밖으로 끄집어 내니 마음 속 저 멀리 바닥에 눌려 있던 엄마와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오늘은 첫째 아이가 소풍에서 가져온 식판을 설거지하던 중 남아있던 밥풀과 반찬 자욱들을 보았다.
맛있게 숟가락을 빨고 그릇을 긁어먹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속에 기특하고 귀여움이 차올랐다.
엄마도 어릴 적 내 도시락통을 설거지할 때 같은 마음을 느꼈을까
"멸치는 맛있었어? 다 먹었네?
이건 모자라지 않았어?"
학창 시절 내게 묻던 엄마의 질문들이 들렸다.
떠올리고 나니 정체 모를 좋은 호르몬이 혈관을 타고 도는 게 느껴졌다.
잦은 접촉을 의미하진 않지만 힘들었던 나날과 분리하여 행복한 기억은 가지고 올 것이다.
오랜만에 심리상담센터를 방문한 날이어서 마음이 편안한 탓이었을까.
잠자리에 들기 전 가족과 식탁에 모여 앉았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구수했다. 선생님의 따스한 얼굴에서 익숙한 눈빛을 보았었다. 기껏해야 3초였을까. 잊고 있었던 나의 외할머니의 눈빛이다.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던 선생님의 눈빛을 담아왔나 보다. 그 눈빛은 자연스레 딸들에게 전해졌다. 아이들은 우리의 시간이 영원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둘째 딸 : 엄마 아빠, 사랑해~
첫째 딸 : 엄마는 언제 할머니 돼?
나 : 엄청 멀었지~ 너희들이 어른이 되어 아기도 낳고 더더 있다가 할머니가 돼.
아주 오랜 시간이니 걱정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첫째 딸 : 엄마가 하늘나라 가기 전까지 엄청 사랑해 줄 거야.
나 : 정말? 고마워. 엄마는 너희들 영원히 사랑할 거야~
아빠 : 하이구, 그렇게 예쁜 말을 하다니... 우리 딸 참 아름답다.
햇님아, 아름답다에 '아름'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아?
첫째 딸 : 무슨 뜻인데?
아빠 : '아름'은 '나'라는 뜻 이래. 나 다울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뜻이지.
햇님이는 햇님이 답게 아름답게 살아가길 바랄게. 햇님이 웃는 얼굴이 참 아름답다~
나 : 어머나, 그런 뜻이 있는지 몰랐네?! 정말 감동의 말이다......!
어둡고 긴긴 터널에서 '나'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오늘 하나 더 알았다.
반추를 위함이 아닌 과거를 돌아보며 아파하는 일은 이제 끝났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연단케 해 준 고마운 역사일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제부터는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환경에 나를 데려다 놓을 것이다. 내 안에 살아있었던 작은 불꽃의 정체, '사랑의 눈빛'에 다시 장작을 지피는 일에 열중할 뿐이다. 자신을 충만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그 힘으로 자연스레 내 아이와 타인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로 인해 더욱 풍성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설레이고 흥분되는 일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자라고 있고 함께 세상을 누리기에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