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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뎅뎅 Jul 09. 2023

퇴사 여행기 2 런던

 런던은 내가 좋아하는 게 다 있는 곳이라 기대가 컸다. 오아시스, 비틀즈, 10번은 본 로맨스 영화들, 문학, 해리포터, 조경이 예쁜 공원들 등.. 여행 계획을 짤 때도 여유로움 그 자체였던 다른 도시에 비해 런던은 하루를 3-4개의 스케줄로 꽉 채워도 모자랐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은 물가였다. 학생 시절 갔던 동유럽이나 지중해 국가에 비해 (3명이 갔으므로 경비가 줄어들기는 했었지만) 숙소비가 최소 4배였다. 평점 별로 안 높은 비즈니스호텔도 1박에 30만 원부터 시작해서 6박 7일 머물러야 하는 나에게 너무 크게 와닿았다. (사실 예산 제대로 안 짜기는 했음. 지금도 정확히 카운트 안 해봤다..)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한 게 에어비앤비인데 평점이 만점 가까운 예쁜 가정집이 1박에 10만 원 초반이었으니, 약간 고민하다 에어비앤비에 도전해 보기로 했고, 이는 이번 여행 중 유일하게 후회하는 부분이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해 큰 캐리어를 끌며 엘리자베스라인 기차를 타고 튜브로 갈아타서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8시 정도였다. 런던도 여름이라 해가 9시 정도에 졌으므로 밖은 환했다. 3박을 예약한 첫 숙소는 은퇴하신 할머니가 사시는 켄티시 타운이라는 나름 부촌의 전형적인 영국식 주택이었다. 1층에 뒷마당과 부엌, 거실이 있고 1.5층에 화장실, 2층에 내가 머무를 방과 할머니의 방이 있었다. 집은 영화를 찍어도 손색없을 만큼 감성 있고 아기자기하게 예뻐서 좋았지만 결론적으로 나와는 정말 맞지 않았다.

 할머니는 슈퍼호스트답게 집 관리가 매우 철저하셨는데 그 감시(?)와 잔소리, 예민함 때문에 나는 머무는 내내 너무 피곤하고 불편했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면 그때 그때 바로 간단한 청소는 내가 해야 하고 밤에 전등 켜면 바로 세이브 에너지.. 하시며 등을 끄라 하셔서 밤마다 눈치 봐가며 등을 켜야 했고(;), 그 외에도 뭔가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나가서 잠깐 피곤하면 집에 와서 쉬었다가 오후에 다시 나갈 생각이었는데, 집에 잠시 들르는 것도 말을 미리 해야 하고 들어오면 따라 들어오셔서 커튼을 내려라, 외출 시에는 충전기 충전은 하지 말아라 등.. 계속해서 잔소리가 이어졌다. (돈 냈잖아요..ㅠㅠ) 세탁기도 써야 해서 부탁했는데 그건 대놓고 탐탁지 않아 하셔서 나도 찝찝했지만 그냥 다른 숙소 가서 해야겠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아 맞다. 너의 빨래 부탁 깜빡했네. 말을 하지 그랬어" 하시는데 빌려주기 싫어서 깜빡한 척하신 티가 나서 더 기분이 상했음.. 마지막 체크아웃 날에도 시간이 애매해서 짐을 30분 정도만 맡겨줄 수 있냐고 부탁했는데 그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셔서 오전에 급히 외출했다가 우버까지 타고 정확히 체크아웃 시간에 도착했더니 정작 본인이 외출 중이셔서 밖에서 기다림..

 런던의 첫인상이 에어비앤비의 할머니였어서 너무 깍쟁이에 계산적이고 인정 없는 인상을 받는 바람에 + 몸이 편하지가 않아서 기대했던 런던은 생각만큼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두 번째 에어비앤비는 도착했더니 웬 남자애가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분명 집주인이 아주머니라서 예약한 건데. 알고 보니 아들이 같이 사는 집이었고 아들 방과 나는 바로 앞인데 잠금장치도 없지, 아들 여자친구까지 같이 사는데 화장실도 같이 써야 하지.. 내가 남자라면 모를까 첫 번째 숙소에서 너무 지친 상태라서 고민하다가 체크아웃 전에 취소하고 (예약금 대부분 날아감) 그냥 비싸도 다른 호텔을 예약했다. 다만 내가 꼼꼼히 체크하지 못한 탓도 있고, 호스트 아주머니가 메신저로만 대화하긴 했지만 너무 친절하셨어서.. 나도 나의 실수도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취소하기는 했다.

 아무튼 교훈은, 앞으로는 절대 에어비앤비 하지 않기.. 한국과 다르게 외국 에어비앤비는 호스트랑 같이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디테일한 부분은 많이 스킵되어서 복불복인 것 같다.


 아무튼 숙소는 내게 이런 시련을 주었지만 런던 자체는 완벽한 도시였다. 도시 자체가 한 치의 빈틈없이 가꿔지고 완벽하게 설계되어 그 많은 인종과 인구가 원활하게 순환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신기했던 점은 도로가 대부분 2차선인데도 불구하고 트래픽이 심하지 않았다는 것) 단 한 건물도 빠짐없이 미관적으로 도시에 아름답게 융화되었는데, 이는 건물이 건물주의 토지 소유개념이라기보다는 영국 정부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뭐 얘네야 침략을 당하지 않았으니 가능한 거긴 하겠지만 각종 역사적 박물관과 유적지들도 그대로 보존되어 한 정거장 건너 명소들이기도 했다. 틈틈이 있는 공원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규모와 조경들도, 도시의 세련됨을 표출하는 각종 디자인 장치들도. 디자인과 패션, 조경 등 미학적인 부분에 큰 공을 들일 수 있는 여유의 유무는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인 개발 도상국과의 차이점이다. 그래서 지엽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식당 테이블에 생화가 있느냐 없느냐가 그 나라의 판단 지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크게 와닿은 건 영국이 가진 문화 콘텐츠들의 힘이다. 발길 가는 데로 걷다 보면 각종 책, 영화, 음악 가사에서 들어본 익숙한 지명들을 만날 수 있다. 리젠트 파크를 걷다 구글맵으로 근처 유명한 장소 검색 해보면 바로 옆이 셜록홈스의 베이커스트릿이고, 홈즈 책에 나오는 미행하는 거리들 (트라팔가 광장, 워털루 등)은 버스 타고 지나쳐온 곳들이다. 식당 가는 길에도 건물마다 붙어 있는 표지판에는 찰스 디킨스가 살았던 곳, 셰익스피어가 글 쓴 곳이라는 놀라운 내용들이 시크하게 붙어있었다. 소호의 펍들은 각종 뮤지션들이 신인 시절 공연을 했던 곳이고 평범한 횡단보도도 비틀즈 앨범의 애비로드다. 사실 그런 인물들의 비하인드가 없다면 평범한 건물이었을 텐데, 지구 반대편 구석에서 자란 내가 처음 방문한 도시에서 이렇게 기시감을 느끼는 건 글의 전파력과 엄청난 힘에 기인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해리포터 스튜디오였다. 황홀 그 자체였음)


 에어비앤비 할머니 때문에 런더너에 대한 편견이 좀 생긴 것 같기도 하지만, 내가 느낀 런더너들은 타인에게 큰 관심 없는 개인주의 느낌이 강했다. 먼저 사진을 부탁하거나 길을 물어보면 물론 친절하게 알려주지만 그게 아니라면 선뜻 먼저 말을 걸거나 미소를 보이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대도시의 특징일 수도 있지만 타 여행지에 비해 더욱 그런 느낌이었는데 (이게 나쁘다는 건 전혀 아니다. 내가 일상생활에서 선호하는 스타일) 야경투어할 때 가이드님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영국은 아직도 계층 사회가 뚜렷한 편이라고 한다. 귀족들이 쓰는 발음인 포쉬 잉글리시가 구별되어 있고 (만약 그 계층이 아닌데 포쉬를 쓰면 비웃는다고 함) 영화나 연극 등 예술계는 그러한 발음 때문에 예부터 귀족들만 진출하는 태세가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게 불편한 진실이라고 한다. 이민자들도 많아 다인종이 살아가는 도시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계층 사회가 쉽게 뚫리진 않아 사람들이 융화된 느낌은 덜하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도 있을 것이고, 확실히 동남아 국가나 하와이 같은 기후가 따뜻한 휴양지에 비해 사람들의 행동 스타일이나 분위기가 확연히 차이가 나서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런던이 정말 좋았지만 살짝 외롭고 삭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런던은 여태껏 다녀본 곳 중 거의 유일하게 재방문하고 싶은 도시였다. 도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무척 많았고 인간의 손에 깔끔하게 잘 가꿔진 자연도 조화로웠다. 또 겨우 며칠 겉핥기식으로 탐방한 도시지만, 조금 더 깊이 있는 경험을 하면 배울 게 끝없는 도시 같기도 했다. 언제 기회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음에는 좀 더 공부를 한 다음 제대로 도시를 경험하고 싶다 생각하며 스톡홀름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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