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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뎅뎅 Jul 05. 2023

퇴사 여행기 1 마닐라


 퇴사 후 거의 쉴 틈 없이 바로 출국하게 되었다. 첫 행선지는 중학교 친구 H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였다. H는 한 회사의 한국 지사장으로 마닐라에 간 지 1년 정도 되었다. 처음 간다고 했을 때 상상하던 필리핀의 이미지 (당시 두테르테, 마약, 청부 살인.. 이런 화두로 기사가 빗발치던 시기)라 걱정되었는데 가서 전해온 근황으로는 마닐라 부촌에 숙소가 있고 가드들도 상시 거리를 순찰하는 곳이라 안전하고 치안도 좋아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놀러 오라고 했지만 1년에 휴가 3일뿐인 근무 약사로서는 여유가 생기지 않아 못 가던 차에, 퇴사를 결정하면서 혹시 번복될까 봐 마닐라행 비행기표를 미리 보험 삼아 끊어두었다. 사실 그 뒤 여행지들은 계획에 없었는데 마닐라 간 김에(?) 이번 아니면 언제 또 가겠나 싶어 추가로 계획된 것이다.


 약 4시간의 비행을 거치고 고맙게도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 덕분에 편하게 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그런데 지나가는 동네가 여의도 뺨치게 쾌적하고 멋진 건물들로 가득 찬 것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는데도 깔끔하고 핫해 보이는 펍이나 칵테일 바가 오픈해 있었고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도 금요일 밤을 즐기고 있었다. 친구의 집이 있는 곳과 거쳐왔던 동네가 마닐라 최고의 업무지구이면서 신흥 부촌 신시가지였던 건데, 사실 마닐라 머무는 동안 이 동네들만 왔다 갔다 해서 내게 마닐라는 이렇게 세련되고 여유로운 도시로 각인되었다.

 집에 도착해서 회포를 풀고, 다음 날은 친구의 로컬 지인들의 추천으로 외국인 거의 없는 예쁜 박물관과 레스토랑을 갔고 카지노도 구경하였다. 친구가 출근한 평일에는 주로 마사지받고 근처 쇼핑몰들 구경하며 놀았는데 원래대로라면 약국에서 하루 종일 투덜거리며 부정적 이야기만 하는 직원분의 구시렁거림을 들으며, 정신없이 움직이며 조제하고 진상 손님들과 싸우고 있었을 생각을 하니 모든 것이 행복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만약 퇴사했더라도 한국에 있었으면 끊임없는 불안과 걱정의 잔상들로 마음 놓고 해방감을 느끼지는 못했을 텐데 타지에서는 그런 것들을 잠시나마 외면하고 새로운 환경을 즐기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친구와 5일 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필리핀에 거주하면서 느꼈던 특성들과 어떤 점이 한국과 비교했을 때 장단점인지 부터 시작해 사소한 고민까지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끊임없이 밀린 수다를 떨었다.

 마닐라는 그 지역이 유독 중심 지구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한국 스타필드 같은 대형 쇼핑몰들이 5분마다 있다. 그래서 아무리 부촌이라도 이 쇼핑몰들의 공급을 맞출 수 있는 수요 소비력이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는데, 그게 각기 다른 이유로 유지가 된다고 한다. 이 지역의 소비 인구는 대대로 유통업이나 리조트 같은 사업을 해서 넘사벽의 부를 쌓아 대물림하는 현지 부자들이 있고, 주재원이나 외국계 회사의 외국인들, 그리고 현지 직장인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현지 부자들은 한국의 '재벌'이란 계층 개념으로 딱히 나누지 않아도 그 수가 많고 소비력이 엄청나다고 한다. 외국인들도 고국의 화폐로 받는 급여에 비하면 현지 물가는 저렴해서 소비력이 나쁠 수 없다. 그런데 현지 직장인들은 제 아무리 전문직이라도 급여가 한국에 비해 엄청 낮다. (약사도 페이 100만 원 안팎이라고 함) 그런데 필리핀 사람들의 성향 자체가 경쟁적이지 않고, 빈부 격차나 정치 부패에 대해서도 불만을 느끼거나 개선하려는 전투적인 면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격차를 이겨내고자 고군분투하며 사는 게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만족하기 때문에 물가에 비해 낮은 급여에 대해서도 크게 반발하지 않고 어차피 모이지 않는 돈이라 생각해서인지 치열하게 저축을 하거나 재테크를 하는 게 아니라 화끈하게 다 써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 회사에서는 다 써버릴까 봐 두 번에 걸쳐 나눠서 급여 준다고 함) 심지어 전기 민영화로 더운 나라에서 전기세가 말도 안 되게 높아 월급의 꽤나 큰 퍼센티지를 전기세로 지출해야 하는데도 그냥 수긍한다고 한다. 독재 정권 통치 하라 그런 반발이 시작조차 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사람들의 성향이 대체로 만만디라고 한다.

 이러한 특성은 사실 앞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평생 고뇌할 기준 요소이기도 하다. 제자리에서 발전 없이 적게 쓰고 정신이 행복하게 사느냐, 결핍을 촉매 삼아 발전하고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와 좌절감을 안고 사느냐는 '권태와 야망을 오가는 시계추 인생'의 과제인데, 한국 사람들 특히 현 젊은 세대는 후자의 태도를 더 쳐준다 생각..

 아무튼 이러한 성향의 기저로 필리핀 사람들은 정말 친절하고 다정하고 여유로웠다. 여행자의 시선에서 한 도시에 대한 기억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미지로 남게 되는데 나는 그래서 마닐라가 정말 따뜻했고 그곳에서 만난 친절하고 순수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났다.

 

 역시 다정하고 따뜻한 친구의 호스팅으로 마닐라에서는 더없이 풍족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친구는 그곳에서 친구들도 많이 만들었고 본인의 똑똑함과 야무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잡고,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잘 지내는 것 같아 존경스럽기도 했다. 생각보다 한국 마닐라의 비행기 값이 저렴함을 알게 됐으니 다음 방문 땐 같이 휴양지 호핑투어를 가자 기약하며 런던으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런던의 완벽함과 화려함 안에서도 한 동안 마닐라를 그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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