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유럽 여행지 범주에서는 살짝 비껴가는 스톡홀름을 여행지로 삼은 것은 단순히 쉬고 싶어서였다. 여태껏 여행지 중 독일의 소도시들이 좋았던 이유도 볼 게 너무 많아 빈틈없는 일정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닌, 적당히 그곳의 분위기를 유유자적 느낄 수 있는 쉼과 견문의 조화였기 때문이다.
코펜하겐과 헬싱키까지 다 들릴까 생각도 했지만 후기를 보면 그렇게 열심히(?) 다 도장 깨기를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아서 세 도시를 구글링으로 비교해 보고 그래도 가장 따뜻한 느낌인 스톡홀름으로 정했다. 블로그를 찾아봐도 정보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고 대다수가 3박 이상은 하지 않는 도시 같았지만 나는 어찌 됐든 낯선 곳에서 'Do nothig day'를 보내는 것도 목적이었기 때문에 스톡홀름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르는 일정을 짰다.
스톡홀름을 간다고 하니 '거기는 친구 집 놀러 가도 밥도 안 준다던데 (세계적인 밈 유행ㅋㅋ), 물가 어마어마하다던데' 하는 걱정을 주변에서 해서 약간 긴장했었지만 막상 내가 경험한 스톡홀름은 따뜻하고 여유로운 도시였다. (물가는 런던이 너무 비싸서 상대적으로 괜찮아 보임)
런던에서 비행기를 탔는데 동양인은 나 혼자 뿐이고 대부분 스웨덴 사람들 같았다. 어렸을 때는 서양인들의 외모가 비슷하다 생각했지만 이제는 딱 보면 대충 지역이 나오니 같은 유럽 대륙이어도 국가 별로 미묘하게 구별이 되는 게 신기하다. 스웨덴 사람들은 정말 평균 키가 컸고 비행기나 버스를 타도 좌석이 넓고 높아서 발이 땅에 겨우 닿는 대중교통도 있었다. 비행기 내 옆 자리 역시 커다란 스웨덴 청년이 타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멀미가 심한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런데 눈 떠보니 나는 그 청년의 어깨에 기대서 자고 있는 것이다. (여행하면서 이런 경우 좀 많았음.. 죄송;) 깜짝 놀라서 미안하다고 했는데 숫기 없는 청년은 본인도 난감했을 텐데도 모르는 척 계속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고 책만 읽었다. 내가 민망할까 봐 그랬겠지? 아무튼 이 청년과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 시내 가는 기차에서 만나 본인의 LP를 보여주며 설명해 주던 아저씨, 길에서 만난 할아버지까지 여행 내내 스위트하고 다정한 사람들만 만났다. 그들의 친절함에는 항상 선이 있고 적당한 온도가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대부분 절대 먼저 말은 걸지 않는데, 내가 구글맵 보며 길을 헤맬 때나 셀카봉으로 위태롭게 셀카 찍고 있으면 누가 봐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게 보이게 옆에 와서 서성거리거나 눈빛을 보낸다. 그래서 내가 먼저 도와주시겠어요..? 말을 걸면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상세하게 알려주고 도와준다. 이 정도의 친절은 딱 내 삶의 온도와도 맞아서 스톡홀름을 머무는 동안 고향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스톡홀름에서 4일은 시내 중심가에 머물렀고 나머지 이틀은 외곽에 머물렀다. 사실 후자는 엄청 가성비 호텔이 있길래 생각 없이 예약한 건데 그렇게 외곽인 줄 몰랐음.. 파주 느낌의 아무것도 없는 외곽 지역이라 (거리 자체는 그렇게 멀지 않음) 여기서도 동양인 나 밖에 안 보여서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볼 정도였다. 이곳은 대중교통비도 비싼 편이고 몇 번 갈아타야 해서 웬만하면 시내 중심가에 머무는 것이 좋다.
시내 주요 관광 포인트나 박물관들도 모두 도보 가능 거리라서 사흘간 쉬엄쉬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사실 제대로 관광만 한다면 이틀 안에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도시지만 사흘간 구석구석 탐방하고 카페에서 친구들에게 엽서도 쓰고 강가에 앉아 음악 들으며 물멍 하는 시간들은 웅장한 건물들을 관광하는 것 못지않게 좋았던 시간들이다.
여름의 스톡홀름이 여행자의 입장에서 좋았던 건, 이곳 역시 백야 현상으로 밤 10시가 되어서야 좀 어둑어둑해진다는 것이다. 늦잠 푹 자고 점심 먹고 쉬었다가 다시 나가도 얼마든지 늦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내 입장에선 이득(?).. 그러나 겨울에는 해가 무척이나 짧고 여름엔 이렇게 극단적으로 길어 호르몬 조절로 인한 우울증 환자들이 많다고 하니 이 평화로운 도시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시내 모든 건물들이 거대한 성냥갑 같은 모양으로 질서 정연하게 강가를 따라 웅장하게 이어져있는데 어디를 찍어도 웨스앤더스 감독 영화 스틸컷 같았다. 건물들 내부 인테리어와 디자인들도 빈틈없이 완벽하고 깔끔해 감탄스러웠던 시내 구경도 매력 있었지만, 나는 여행 마지막 날 했던 숲 속 자전거 투어를 잊지 못할 것 같다.
사실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스웨덴 숲 속 생존하기 체험>이라고,, 숲에 들어가서 약초 끓이는 법 등 조난 시 생존법을 알려주는 투어였는데 이건 날짜 안 맞아서 결국 못했고 대신 신청한 투어였다.
외곽에 위치한 호텔과 인접한 강을 따라가다 보면 국립공원도 속해있는 숲과 호수가 나오는데 정말 동화 같은 풍경이었다. 그날이 주말이라 가족 단위로 호수에서 수영하고 카약 타며 주말을 즐기고 있었는데, 애초에 집이나 빌라가 호수 바로 앞이라 집에서 바로 풍덩 뛰어들 수 있는 주거 + 자연이 조화된 지역이었다. 어찌나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던지 너무 부러워 한국 갈 생각을 하니 짜증 날 정도였다. (아 이렇게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나는 왜 컴피티트 코리아에서 아득바득 살아가야 하나..ㅋㅋ)
호스트인 테오도르에게 한국은 굉장히 경쟁적이고 치열한 곳이라 코리안들 대다수가 주말을 이렇게 보내는 건 어려운 일이고, 스웨덴은 한국에선 복지 국가의 상징이라고 말해줬더니 테오도르는 이건 기본적 삶 아니야?라고 신기해했다. 스웨덴 사람들 한국 와서 직장생활 1주일 하면 밤마다 울 듯.. 착한 테오도르가 내내 사진도 자주 찍어주고 또 혼자만의 시간도 어느 정도 갖게 해 주어서 완벽한 투어였다. 팽팽하게 긴장되어 나의 뇌를 좀먹던 전두엽 신경들이 아주 느슨해진 느낌이랄까. 한국에 가면 또다시 마주하게 될 현실적이 고민과 번뇌들도 이곳에 오면 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숲 투어를 하고 저녁에 아쉬워서 혼자 감라스탄 전망대를 찾았다. 실컷 시내 돌아다녔는데 전망대 풍광을 본다고 뭐가 다를까 하며 갈까 말까 고민하다 간 건데, 너무 좋았다. 탁 트인 절벽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스톡홀름 시내의 전경들과 끈질긴 해가 지랑 말랑하며 오렌짓빛으로 물든 하늘, 거침없이 활주 하는 갈매기들을 배경으로 바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맥주와 와인을 마시는 자유로운 사람들. 나는 그 풍경이 눈물 나게 좋았고 이 느낌을 한 동안은 갖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동영상으로 남겼는데, 그마저도 휴대폰을 든 사람은 나뿐이고 모두가 자유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나도 곧 휴대폰을 내리고 <Whatever>을 들으며 그 순간을 즐겼는데 이렇게 여행의 마무리를 완벽하게 매듭짓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숨 막히는 일상으로 돌아가더라도 이 감정을 잊지 않고, 또 나를 옥죄지 않고 숨 고르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사실 퇴사와 이번 여행은 도피성에 가까웠다. 퇴사를 하면 더 큰 시도를 해야 할 것 막연한 두려움에 힘들어도 굳이 계속 다녔던 것도 있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이뤄놓은 것과 안정된 게 전혀 없는 것 같은 불안감 + 너무 삶이 재미없어서 정말 다음 날 비명횡사한다고 해도 미련 없을 것 같은 상태에서 일단 벗어나고자 내린 결정들이었다. 여행을 다녀와서 당연히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거나 개과천선한 부분은 없지만 그래도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삶들이 존재하며, 나의 도피처가 될 곳은 아주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생긴다. 물론 도피를 위한 총알 장전을 위해 지리멸렬한 생활은 이어지겠지만, 여유와 다정함을 잃지 않는 멋진 개인주의자로 다시 살아가보겠다. 그래도 아직 일할 마음의 준비는 안되었으니 내일도 스피또나 좀 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