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 대로 되고 망해도 좋은 걸!
왜 살아가는지에 대한 의미는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지니던 궁금증이다. 삶이 지루하고 무기력해질 때, 감내하기 힘든 일들을 겪을 때는 살아'낸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 적도 종종 있었다. 여태껏 나의 인생을 대하소설로 볼 때 그러한 시기는 한 편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짧은 순간들이었지만, 그 상태가 내내 지속되는 이들의 심정을 나는 그래서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인생이란 게 결국 삶의 의미를 모색해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일생은 내가 겪은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그런 경험은 없지만 몇 년 전 내 또래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는 알고 지내던 친구를 잃은 기분이었다. 그때 만약 내 주변 사람이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그 고통을 끊어내기 위해 죽음을 생각한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봤었지만 명쾌한 답은 없었고 위로 한 마디가 그 고통에 범접할 수는 없을 거라 여겼다. 오히려 해결 방법도 없이 그래도 살아내 주라고 하는 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큰 공포다. 죽음을 결심하기까지 그리고 그 순간을 상상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을 것이다. 그러한 공포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현재의 삶이 버겁다는 사람에게 무슨 말이 들릴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눈 꼭 감고 한 번만 더 살아내주라 말하고 싶다. 현재 당신을 괴롭히고 버겁게 하는 게 있다면 일단 피하고 도망쳐도 된다. 극단의 상황에서 피하고 도망치는 건 비겁하고 나약한 게 아니라 똑똑하고 용감한 것이니, 나를 괴롭히는 것에서 도망치치 못할 건 없다. 그렇게 괴롭게 하는 무언가가 현재 판단으로는 벗어날 수도 없고 깜깜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지구는 넓고 도피처는 많다. 그 도피처에서 뜻밖의 행운을 만날 수도, 따뜻하고 안락한 자기만의 삶을 꾸릴 수도, 아무튼 어떠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한 기회가 있는데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건 아깝지 않을까?
도피 뒤에 이어질 비난과 책임이 두려울 수는 있지만 사실 그건 내가 앞으로 살아갈 긴 세월에 비하면 책 한 페이지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과로 비난을 하는 사람은 어차피 인생에 별로 필요 없었던 사람들이고, 용기 있는 선택에 응원과 칭찬을 해줄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그저 이유 없이 무기력에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직 나를 자극시킬 만한 무언가를 만나지 못해서이며 나의 호르몬들이 그저 일을 안 해서 그런 것이라 가볍게 여겼으면 좋겠다. 볕을 쬐고 몸을 움직이며 몸속 세포들을 깨어나게 하고 나에게 행복감을 줄 무언가를 모색하는 걸 시작한다면, 그리고 운 좋게 그것을 찾는다면 인생은 앞으로 행복 회로에 들어서게 될 수도 있다. 무기력의 늪에는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는다. 사람에 치이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일 하고, 움직이고, 말을 하고 볕을 쬐며 행복 호르몬을 만들어내 보자.
내가 살면서 고민하고 좌절에 빠지는 순간 되새기는 마법의 문장이 '될 대로 되고 망해도 좋은 걸'이다. 검정치마 '젊은 우리 사랑'에 있는 가사인데, 나는 이렇게 완벽주의의 피로감 많은 현세대를 살아가는 데 지니면 좋을 마인드라 생각한다. 빈틈없이 결벽한 세상이 거시적으로 좋아 보일 순 있어도 내가 살아가려면 무지 피곤하기 때문에 스스로 용인할 수 있는 범주의 일탈과 도덕적 해이(?)는 살짝씩 하며 망해도 좋으니 어찌 됐든 살아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