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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Jun 29. 2016

그녀의 '덫' #30

행복의  몇 가지 조건


12월의 첫날.
거리는 차가운 잿빛으로 물들어 있고, 점점 더 겨울의 중심에 가까워지고 있다.

일터로 향하는 출근길. 매일 걷는 이 길이 일상이 되어버린 요즘.
어제와 다름없는 반복되는 나날들. 하지만 어제와는 또 다른 시간들....

뒤돌아보니 올 한 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부모님이 제주도로 내려가셔서 독립을 하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하나와 함께 살게 되었으며, 요가 자격증을 취득해서 센터에서 레슨을 하게 되었고, 오랜만에 필상 선배와 재회했고, 그리고... 무경을 만났다.


그와 만났던,  짧지만 강렬했던 그 시간들.


전에 그가 물었었다.

'내가 그리는 세상 속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느냐고.....'


항상 내 곁에서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그의 눈빛,  차가운 내 손을 잡아주는 그의  손,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 나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나에게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


'그가 없는 세상 속에서 결코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까.'


매일매일 축복받은 것처럼 살아야지. 그와 함께 행복해야지. 이젠 혼자가 아니니깐.





 


"안녕하세요~"

"예랑씨 안녕~~~!!"


결국, 시창의 개인 요가 레슨을 맡게 되었다. 어차피 새벽반에 수강생이 몇 명이 안 되어 폐강이 될까 겁이 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특강을 맡을 줄은 몰랐다.


넓은 강의실에 그와 단 둘이 마주 보고 앉았다.

시창은 반가워 꼬리 치는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내가 하는 말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명상곡을 틀어놓고 선율에 따라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호흡을 편안하게 합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가슴이 편해질 때까지 반복합니다."


기본자세에서 허리를 쫙 펴 다리선과 일자가 되는 동작을 하며 흘낏 그를 쳐다보았는데, 시창은 내 몸짓을 한번 보더니 그대로 따라 한다.

'보기보다 유연한데.'


"이번 자세는 온몸의 기를 모아 머리를 맑게 해주는 동작입니다."


바닥에 머리를 댄 채 등을 말아 올려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공중에서 일자로 쭉 뻗은 다리의 라인을 한동안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살짝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같은 동작을 취한다.

 

동시에 날 쳐다보았는데, 그의 눈빛은 마치 '어때 어때? 나 잘하지? 빨리 칭찬해줘.'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공이 활짝 열리는 그의 눈은 잔뜩 신이 나서,

'또또, 뭐 할까? 응응?'


"나 엄청 잘하죠? 어때요?"








무경과 그가 형제라는 사실이 가끔 날 놀라게 했는데,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의 차이는 확연했다.

무경은 느긋하고, 조용하며, 그러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날렵할 정도로 민첩한 하얀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반면에 시창은, 항상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발과 혀를 내민 채 눈을 반짝이며 졸졸 쫓아다니는......


"개 같아요."


헉, 머릿속에서 머물러있던 생각들이 입을 뚫고 나와버렸다.

순간, 정적이 된 공간에서 시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뭐라고 했어요 방금?"

"네?"


그가 눈을 더 크게 뜨며,


"개같다고요 내가?"


그 말에 당황한 난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니, 그게 아니고, 강아지 같다고요. 너무 자세가 좋고 잘 따라 해서."


미심쩍은 눈초리로 날 노려보는 그를 달래며


"진짜요. 예쁜 강아지 있잖아요. 말도 잘 듣고 유연한......."


내가 생각해도 말에 두서가 없는데, 그는 또 그 말을 듣고 넘어가, 금세 방긋방긋 웃는다.


"깜짝 놀랐네, 하긴 예랑씨가 대놓고 그런 말 할 사람은 아니지, 그런 말 자주 듣긴 해요. 강아지는 아니고, 예쁘고 잘생긴 라이온 킹 같다고, 으하하핫"


본인의 말에 본인이 반응하는 그의 캐릭터는 참으로 볼수록 신기하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수습하려 시계를 쳐다보았다.


"자, 그럼 오늘은 첫날이니 이 정도로 할게요. 수고하셨습니다."

"벌써? 난 이제 몸이 풀릴 것 같은데 왜 벌써 끝나?"

"처음부터 무리하면 오히려 안 좋아요. 오늘 했던 동작을 집에서도 해보세요. 자세 교정에 도움이 될 거예요. 스트레스도 풀리고."






쫑알쫑알거리는 시창을 뒤로하고, GX실을 나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하나가 다가온다.


"어때 수업은? 할 만 해?"


고개를 끄덕이며 땀을 닦고 있는데, 시창이 벌컥 문을 열고 나온다. 나란히 서 있는 하나와 날 번갈아 쳐다보는 그. 놀란 표정으로 하나를 가리키며


"어라? 하나, 김하나?"

"네?"

"나야 시경이. 손 시경. 나 몰라?"

"뭐? 시경이? 네가 장시창이었어?"


뭐지 이 상황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설마 했는데, 진짜 너였구나."

"어떻게 여기서 만나지? 진짜 오랜만이다 그치? 어떻게 지냈어?"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난, 답답한 마음에 조심히 물었다.


"저기, 내가 좀 당황스러운데, 무슨 상황인지 말 좀 해줄래?"


귀를 쫑긋 세우며 예의 그 똥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날 돌아보는 시창.


"초등학교 때, 같은 교회 다녔어요. 교회누나."

"맞아 예랑아. 얘가 하도 날 쫓아다녀서 엄청 친했어. 키 큰 거봐. 신기하다 진짜."

"맞아 맞아, 내가 좋다고 고백했는데, 작다고 날 찼어. 그래서 그때부터 작정하고 운동한 거야. 우유도 챙겨 먹고"

"어머, 얘는 내가 언제 널 찼다고 그래? 어려서 그랬던 거지. 아니야. 네가 얼마나 귀여웠는데."

"그래? 누나는 그때도 예뻤는데 지금은 더 예뻐졌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야?"

"나 여기서 요가 가르치잖아. 몰랐어?"

"진짜? 와~ 나 소름. 그동안 왜 한 번도 못 봤지? 진짜 신기하다. 여기서 첫사랑을 만나다니."


첫사랑이 '승주'라더니, 대체 너의 첫사랑이 몇 명이냐......


"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해."

"그래, 상담실 가자. 코코아 타 줄게. 너 좋아했잖아. 핫쵸코"

"그걸 다 기억해? 좋아 좋아."

"수업은 어땠어? 오늘 처음이었지?"

"응, 예랑씨가 나보고 개 같데~."

"뭐?"

"잘한다고 칭찬한 거야. 내가 운동신경이 좀 뛰어나잖아?"


저기요~ 나란 사람은 까맣게 잊었는지 둘은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상담실로 향하고 있다.

며칠 동안 인상만 쓰고 있던 하나의 얼굴이 활짝 펴 있다.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집에 돌아온 하나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기분이 한껏 업이 되어있고, 난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굴에 붙인 팩을 떼며 침대에 눕는 하나. 핸드폰을 들어 신나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답장이 오자 '까르르' 웃는 그녀. 날 쳐다보며


"이것 봐 예랑아. 시경이가 나보고 더 어리고 예뻐졌데.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


마치 예전에 무경과 통화를 할 때 옆에서 지켜보던 그녀의 표정과 비슷한 심정으로 쳐다보았는데, 그래도 하나가 저렇게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다.

거의 한 시간을 메시지를 주고받던 하나. 12시가 다 되어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벨소리가 들렸다.

무경이다. 하나를 쳐다보니 그녀가 인심 쓰듯이.


"무경 씨야? 어서 받아. 뭐해? 나 신경 쓰지 말고 얘기 나누셔. 난 음악 듣다 잘 테니까."


사람이 하루 사이에 저렇게 상냥해질 수 있다니.


-여보세요?-

-자기야 잤어?-

-아직. 자려고 누웠어.-


그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왜? 무슨 일 있어?-

-나 잠이 안 와.-

-응?-

-불면증이 또 도진 것 같아.-

-왜 그러지? 뭐 스트레스 받는 거 있어? 요새도 악몽 꾸고 그래?-

-가끔? 예전보다 자주는 아니고,-

-다행이네. 난 또 아픈 줄 알고.-

-나 바다 보고 싶어.-

-갑자기 웬 바다? 겨울인데?-

-바다는 겨울에 가야 한적하고 좋아. 동해 가고 싶다 휴...... 자기 언제 쉬어?-

-원래는 토요일에 쉬는데 이번 주에는 로테이션이 꼬여서 좀 봐야 할 것 같아.-


그는 한참을 동해가 얼마나 근사한지, 하얀 파도와 푸른 바다를 비추이는 눈이 부신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대해 열심히 묘사를 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였는데, 동해 같은 바다는 어디에도 없다는 설명과 함께, 겨울바다의 낭만을 느끼려면 꼭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야 한다고 예쁜 말만 골라하며 힘주어 강조하는 그에게 결국.


-알았어. 같이 가. 내일 출근해서 확인해볼게.-


그가 기분 좋을 때 내는 짧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들뜬 목소리로 '좋아 좋아'를 반복했다.

그의 반응이 귀엽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하나가 잠들어 있다.

이불을 발로 차고 코를 골고 있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무경과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누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자기가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나 잠이 잘 올 것 같은데, -


그의 말에 사랑한다는 표현 대신 핸드폰에 입술을 가까이 대었다.

'쪼옥'


-잘 자. 굿나잇-





30화를 올리며.....


처음 '그녀의 덫'을 시작할 때 대략 10화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어느덧 30화까지 오게 되었어요.

조금씩 많은 분들이 구독해주시고, 부족한 저에게 격려와 응원 보내주셔서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랑과 무경,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이 마치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오히려 제가 그들에게 동화되어 가는 것 같아요.


'그녀의 덫'은 8월까지 연재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끝이 날 때까지 아무쪼록 예쁘게 지켜봐 주세요.


여름의 시작입니다. 무더위에 컨디션 잘 챙기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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