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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개구리 Aug 23. 2016

그녀의 '덫' #38

운명을 믿으세요?

집 앞에 도착해 무경이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 앞에 서서, '안녕'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는 그에게


" 자기를 속이려고 한 게 아니야.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난, 그런 식으로 약한 모습 보여주기 싫어. 특히 자기한테는.

머리가 복잡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내가 연락할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마치고, 그가 차에 탔다.


난 그의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무경이 그렇게 가 버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난 여전히, 새벽과 저녁 타임에 요가 수업을 나갔고, 중간에 비는 낮 시간 동안, 스포츠센터에서 오여사를 도와주며 대부분의 시간을 멍하니 지냈다.


하루 종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사무실로 달려가 부재중 전화가 와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하기에 바빴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매사에 의욕 없이, 마치 나사 빠진 인형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수업에 오늘도 시창이 에너지가 넘치는 모습으로 요가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마주 보고 앉아 인사를 나누었는데,


"예랑씨, 얼굴이 핼쑥한데, 무슨 일 있어요?"

"아뇨. 입맛이 없어서."

"형도 그렇고, 둘 다 이상한데? 무경이 형 요새 회사에 처박혀서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 보기 힘들어요, 어떻게 연예인인 나보다 더 바쁠 수가 있냐고.

보니까 잠도 안 자고 일만 하는 것 같던데, 진짜 두 사람 괜찮아요?"


난 그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는데, 그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 그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글프고, 화가 났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왜일까.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일까. 그를 위해 한 내 행동이 그렇게 기분이 나빴을까. 이렇게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할 정도로.


"요새 다들 이상해. 승주 누나도 아예 전화기 꺼놓고. 설마 셋이 머리 뜯고 싸운 거 아니죠?"


난 그 말에 한숨을 내쉬며


"수업 시작할게요. 벌써 십분 지났어요. 오늘은 상체 위주로 할게요."








모두가 퇴근한 센터에서 뒷정리를 하고, 문을 잠갔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 차가운 밤의 한기에 코트 깃을 움켜쥐며 집으로 걸어가는데,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급하게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어보니, 승주였다.

화면에 뜬 그녀의 전화번호를 쳐다보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는데,


"예랑씨, 나예요. 이승주."

"네..... 안녕하세요?"

"지금 어디예요? 나 연남동인데 술 한잔 할래요?"

"술이요?"

"네, 같이 한잔 해요. 할 말도 있고. 주소 문자로 찍어줄게요."


전화를 끊은 그녀가 잠시 후, 메시지로 주소를 보내왔고, 난 잠시 망설이다가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가 있다는 곳에 도착한 난, 가게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은 룸이었고, 문을 열어보니 그 안에 승주가 혼자 술을 먹고 있었다.

날 보며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녀.


"어서 와요 예랑씨. 앉아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와 마주 보았다.

평소에 병원에서 보던 그녀의 차분한 모습과는 사뭇 달라보였는데, 긴 머리를 풀고, 화려하고, 짧은 원피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더 편해 보였다.


"예랑씨 술 잘 먹어요? 뭐 좋아해요?"

"전 그냥. 맥주 마실게요."

"그래요 그럼, "


그녀가 내 앞에 놓인 잔에 맥주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가득 채웠다.


"난 독주가 체질이라, 맥주는 배부르고 가스 차서 별로예요. 빨리 먹고 취하는 게 좋죠."


그녀가 잔을 들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 날, 무경이랑 괜찮았어요?"


머뭇거리며 대답하기를 주저하는 날 보더니


"예랑씨 얼굴 보니, 알 것 같아요. 무경이는 참 정이 많은 남자예요. 겉보기에는 차갑고 냉정해 보여도 자기 여자한테는 자상하고, 잘 챙기고, 따뜻하고 그래요.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항상 자기 가족을 빨리 갖는 게 소원이었데요. 옆에서 보면, 불쌍한 거 안된 거 잘 못 보고 도와주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랬어요.

내가 전문의 되기 전에 방황도 많이 하고, 힘들 때 무경이 만났어요. 그땐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내가 불쌍하고 안돼 보였나 봐요. 그런데 난 그런 말 할 자격 없어요. 무경이가 사람 잘 믿지 못하고, 저렇게 날카로워진 거 나 때문이거든요."

"그게 무슨......."

"내가 바람을 피웠어요. 무경이 만날 때."


그녀가 잔을 비우더니,


"그땐, 무경이가 아픈 걸 몰랐어요. 며칠을 연락이 끊겨서 집 앞에 갔는데 어떤 여자가 그의 집 으로  들어가더라고요. 그걸 보고, 다른 여자가 있어서  연락도 안 받고  바람 났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만 정신이 나가서 .... 알고 보니까 시창이 만나러 온 여자였구요."

"..........!"

"그전에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죠.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고 미안했어요. 사람 믿지 못하는 게 꼭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그 일로 무경이랑 헤어졌고, 시창이와는 왠수가 됐죠.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그럼, 승주 씨가 시창씨 첫사랑이는 건?"

"아~ 어릴 때 엄마들끼리 친구였어요. 시창이 꼬맹일 때 몇 번 챙겨줬는데, 한동안 오리 새끼처럼 쫓아다니더라고요. 걔도 엄마한테 정을 못 받아서 애정결핍이 있거든요. 시창이를 먼저 알았어요. 무경이 만난 것도 시창이 통해서였고."


그렇구나.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많았구나.


"예랑씨는 운명이라는 걸 믿어요?"


그녀가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난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주저했고,


"웃기죠 의사가 이런 말 하니까. 그런데 난 심리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믿거든요. 사람의 의식에 관한 많은 연구가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고, 그중에 운명에 관련된 이론이 있어요.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과 비슷한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느다란 날실과 홀실이 있고, 그 실들이 만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연이 필요하데요. 그렇게 어렵게 만난 인연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죠. 해피엔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그런데 그 결말의 원인이 전생에서 이어져 온 업보라는 거예요. 그것을 '업'이라고 하기도 하고, '카르마'라고도 부르죠."


진지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나 다음 달에 미국으로 돌아가요. 부모님이 거기 계셔서..... 무경이 좀 좋아지면 가려했는데. 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그래요. 이제 내 삶을 살아보려구요. 그동안 정말 지쳤거든요."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것도 운명일까요?"


그녀의 질문은 마치,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위한 '독백'과도 같았다.






"고마워요 얘기 들어줘서. 예랑씨는 오해 없이 내 말 들어줄 것 같아서.... 오늘은 내가 상담 받은 것 같아요. 갈게요. 또 봐요"


그녀가 택시를 타면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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