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자가 같지는 않아요. 간혹 너무 오래되거나, 변질된 기억들이 있는데, 오히려 기억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열지 않아요. 우린 그것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죠. 열 수는 있지만, 열어서는 안 되는 열쇠."
그렇게 승주와 헤어지고, 나도 모르게 무경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참으려고 했는데, 술을 먹어서인지 오늘따라 그가 더 보고 싶다.
삼십여분을 걸어 그의 집 앞에 도착하여 올려다보니, 텅 비어 있는 듯 집에 불이 꺼져 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까? 아니면 일찍 잠이 들었을까.
옥탑방으로 향하던 계단의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그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찬 바람에 노출되어서인지, 눈이 충혈되고, 코에서 콧물이 나온다.
'으으..... 추워.' 한기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는데, 자꾸 졸음이 온다.
몇 잔 안 마셨는데.....
며칠 잠을 못 자서인가 보다.
잔뜩 몸을 웅크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앞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랑씨, 여기서 뭐해요?"
힘겹게 눈을 떠 보니, 시창이 차에서 내려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야 하는데, 고개를 까닥할 힘도 없다.
그가 허리를 숙여 내 어깨를 흔든다.
"여기서 잠들면 어떡해요? 괜찮아요? 일어나 봐요."
그러고 싶지만, 두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다.
시창이 손을 내밀어 내 이마를 만지더니
"열이 장난 아니네. 예랑씨 정신 차려요!!"
그의 목소리가 내 의식 밖으로 점점 멀어지며, 난 앞으로 고꾸라졌고, 잠시 후, 날 번쩍 안아 올리더니 다급한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들어간 시창이 조심스럽게 날 소파에 내려놓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왜 전화는 안 받는 거야. 아 진짜."
다시 내 이마에 닿는 그의 손.
그가 방으로 들어가 두꺼운이불을 들고 나왔다.
"몸을 좀 녹이고, 한 숨 푹 자요."
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몸을 뒤척이며 눈을 떴을 때, 이마 위에 물수건이 손에 잡혔다.
내려다보니, 소파 아래에는 물을 끓이는 전기포터와 면 수건들, 그리고 시창이 몸을 웅크리며 잠이 들어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불을 덮어주었는데, 몸을 뒤척이던 그가 눈을 떴다.
"잘 잤어요? 몸은 좀 어때요?"
"시창씨가 날 데려온 거예요?"
"예랑씨 어제 많이 아팠어요. 열도 나고 많이 떨고, 그런데 집에 약이 없어서."
"잠깐 정신 좀 차린다는 게 그만...."
시창이 몸을 일으켜 세우며
"형 기다린 거예요? 그 추운데 밤새?"
난 힘없이 그를 바라보았고,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 시창.
"전화 안 받더라구요. 어제 또 회사에서 밤샜나 봐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난 그의 말을 들으며 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어느새 날이 밝아지고 있다.
"출근해야겠어요. 고마워요 시창씨."
"상태 안 좋으면 꼭 병원 가요."
"그렇게 할게요."
뒤돌아서는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요. 혼자 고민하지 말고."
센터에서 수업을 하는 내내 오한이 들어 몸을 떨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오여사가
"몸 안 좋으면 그만 들어가. 혼자 살면 컨디션 관리를 잘 해야지. 요새 계속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 집에 가서 좀 쉬어."
오여사가 계속 휴식을 권했지만, 난 끝까지 저녁 레슨을 마쳤다.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바닥에 누워 그대로 뻗었는데, 땀을 쏟아서인지, 한기가 몸을 휘감았다.
몸을 추스려 입구로 내려갔는데, 건물 앞에 필상 선배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
"선배! 웬일이에요? 미국 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가 다가오더니
"공연 마치고 돌아왔어. 잘 지냈어?"
다정한 눈으로 날 쳐다보는 필상.
"전 똑같죠. 무슨 일 있어요?"
"집에 가는 거지? 데려다줄게. 타."
"아니에요. 버스 타고 가면 돼요."
"너한테 할 말 있어. 같이 가자."
그가 내 손을 잡더니, 차에 태웠고, 잠시 후 홍제동으로 출발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랬지? 연락했는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
어제 여분의 배터리를 챙기지 못해 하루 종일 방전 상태였다.
"무슨 일 있어요?"
"나 정연이랑 선후배 사이로 남기로 했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너 때문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 말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럼......"
"이번 뉴욕 공연에서 정연이가 꽤 잘해서 미국 에이전시와 계약하기로 했어. 나한테도 같이 제안이 들어왔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서 거절했어. 국립단에서 아직 할 일도 있고. 아무튼 그래서 단원을 모집하고 있는데, 네가 아직 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그를 계속 바라보았는데,
"물론, 그냥 들어올 수 있는 건 아니고, 한 달 후에 테스트가 있어. 거기에 네가 통과를 해야 해. 다신 안 할 거면 모르지만, 다시 할 거라면 그래도 내가 있을 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공석을 채우는 거라 비공식적으로 인맥 통해서 테스트 진행할 거고. 나도 추천까지 시간이 필요하니까, 잘 생각해 봐. 너무 오래 걸리진 말고."
그의 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난 차에서 내려 집 앞에 섰다. 그가 집 주변을 둘러보더니
"여기야? 춥다. 어서 들어가."
"선배도 조심히 가세요."
"그래. 또 보자."
그가 뒤돌아섰고, 난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배."
"응?"
"고마워요. 얘기해줘서."
그가 웃으며
"결정은 네가 해야지. 갈게. 잘 자."
그가 멀어지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몸살이 난 데다가 하루 종일 긴장해서일까. 온몸이 노곤해 마치 이불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느낌이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멀리서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그 소리를 듣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몸을 뒤척이다가 스르르 눈을 떴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꿈에서 무경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련하고 그리운 이 느낌은 무엇일까.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이마를 만져보았다.
열이 내렸는지 숨쉬기가 한결 편해졌고, 땀이 멈추었다.
'따뜻해. 포근하고 넓고 단단한..... 으응?'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보았는데, 내 옆에 무경이 누워있었다.
두 팔로 날 꼭 끌어안고 잠들어있는 무경.
그 모습에 놀라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그의 단단한 팔에 눌려 꼼짝할 수 없었고, 난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길고 짙은 그의 속눈썹과 반짝이는 그의 입술.
가슴이 두근거린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꿈인가?'
믿기지 않아, 그의 볼을 꼬집었는데, 잠시 후
"아파."
그가 천천히 눈을 떴는데, 바다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에 난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경 씨.....? "
"전화는 왜 안 받아?"
그렇게 듣고 싶었던 그의 목소리.
"계속 문을 두들기다가 안 되겠어서 창문을 뜯었어. 기척은 있는데,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시창이한테 들었어. 병원은 왜 안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