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애극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집개구리 Sep 01. 2016

그녀의 '덫' #40 (최종)

새로운 시작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다가, 다시 귓볼에 머물렀다.
내 목 위에 닿는 그의 감촉.
손을 더듬어 그의 등을 감쌌다.
그의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흐트러지며 날 바라본다.


열기에 사로잡혀 뒤엉키는 눈빛.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그의 손이 셔츠로 닿았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거친 호흡을 몰아쉬는데, 입고 있던 셔츠를 그가 천천히 벗겨낸다.

내 온몸에 키스를 한 무경의 시선이 내 발에 머물렀는데, 어릴 때부터 토슈즈를 신고 무용을 했던 내 발은 못난이처럼 일그러져 있다. 몇 번이나 발톱이 빠져 검게 괴사 된 엄지발톱과 울퉁불퉁한 마디마디에 굳은살이 박여 있다.

부끄러움에 몸을 움츠리고 발을 가리려는데 무경이 내 발을 감싸 쥐더니 발가락 하나하나 입을 맞춘다.


"많이 아팠겠다."


그의 다정한 말에 난


"새 살이 돋아나서 괜찮아. 지금은 하나도 안 아파."


그의 얼굴이 다가오며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자기는, 강한 여자야. 강하고 아름다워. 그런 모습이 날 빠져나올 수 없게 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는 무경.

이내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내 치마 끝에 닿았는데, 난 그의 손을 잡으며


"할 말이 있어."

"타이밍이 좋지 않은데? 나중에 하면 안 돼?"

"중요한 말이야."

"지금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 날 말려 죽일 셈이야?"

"부탁이야. 자기가 들어줬으면 좋겠어. 내가 왜 치료에 동참했는지 꼭 이유를 들어줘."


실망스러운 표정과 함께 긴 한숨을 내쉬던 그가 몸을 옆으로 팔을 괴고 날 바라보았다.


"좋아. 얘기해 봐."


침대에 누워 그와 마주 보며 손을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씩 얘기를 꺼내었다.


"지금까지 나, 힘들 때 항상 도망쳤던 것 같아.

남 앞에서 씩씩한 척, 괜찮은 척했는데 그건 내 약한 모습을 감추려 했던 거였어.

왜냐하면 이유도 없이 항상 두려웠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불안했어.

그런데, 당신을 만났어.

당신을 사랑할수록 신기하게 조금씩 용기가 났어.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당신과 닮고 싶어서.

당신을 사랑할수록 내가 단단해진다는 느낌이 들어.

그런 내 자신이 좋았고, 이젠 무섭지 않아.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내 자신한테 기회를 주고 싶어."


두 손을 꼭 잡고 그의 눈을 마주 보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무경.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이유는 알겠어. 무슨 말인지 이해돼.

하지만 아무리 명분이 있더라도, 찬성할 수 없어.

검사 결과 들었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러다 잘못되면 난 어떡하지?"

"그래서 전문가한테 맡긴 거잖아. 약속할게.

그런 일은 없어.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곁에 있어준다면, 그러면 돼."

"바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승주씨가 다음 달에 미국으로 돌아간데.

다른 사람보다 승주씨한테 받고 싶어. 누구보다 우릴 잘 아는 사람이잖아."

"생각해볼게."

"꼭 다시 한번 생각해줘."

"알았어. 그럼 생각은 나중에 하고, 하던 거 마저 해도 될까?"

"또 할 말이 있어."

"끙......! 나한테 정말 왜 그래? 안돼. 나중에 해."


반항하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필상 선배가 제안한 얘기를 해주었고, 그 말에, 무경이 벌떡 일어나


"절대 안 돼. 그 자식하고 춤을 춘다고? 상상하기도 싫어. 안 돼."

"자기야."

"싫어! 싫다고! 정말 싫단 말이야!!!!!!!!!"


그의 반응에도 아랑곳없이 조곤조곤 차분하게 얘기하는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무경을 만나면서 닮아가는 것 같다. 오히려 그가 이성을 잃고 저렇게 난리를 치는 모습은 마치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며칠 후 승주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무경이가 직접 찾아왔더라고요. 미안하다고 사과하는데 깜짝 놀랐어요. 절대 그런 말 하는 사람 아닌데, 예랑씨 만나서 철 들어왔나 봐."

"그랬어요?"

"나도 그동안 쌓인 게 있어서 한참 욕을 해주고, 뭐 그러니까 풀리더라고요."

"아......"

"다음 주에 예약 잡아놨어요. 아마 한국에서 마지막 진료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혹시 몰라서 응급지원도 받아놓았고, 그런데 무경이가 조건을 걸어서. 그 날 본인도 같이 참석하겠다고. 예랑씨가 하도 사고 쳐서 감시를 해야 한다나 뭐라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 그 말에 웃으며 예약된 날짜를 수첩에 적었다.

 





승주의 진료실 안.

긴 의자에 앉아 그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옆에 무경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서서히 최면 속으로 들어갔다.

전에 보았던 회색 공간 안에 내가 서있고, 그 앞에 상자 두 개가 놓여있었는데....

한 개를 열어 그 안의 열쇠를 꺼내었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는데,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좁은 골목길을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 나.

하얀 셔츠에  빨간 가방을 메고 온 몸에 땀을 흘리며 뛰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주택가.

뒤를 돌아보았는데, 거구의 남자가 날 쫓아오고 있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풀려버린 신발끈에 걸려 넘어졌고, 잠시 후 남자가 다가와 날 번쩍 들었다.

바둥바둥 매달린 난, 겁에 질려 계속 비명을 지르다가 그의 손을 물었는데, 화가 난 남자는 날 내팽개쳤다.

이마에서 '주르륵' 피가 흐른다.

다시 남자가 다가오며  등에 자루를 꺼내고 있다.


그때,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가 주춤하는 사이 난 골목을 빠져나왔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장대비를 맞으며 온 몸이 흠뻑 젖었는데, 세상이 잿빛처럼 뿌옇게 흐려지고 있다.

난 대로변으로 나가 건널목을 지나갔고, 그리고 보았다.

신호등 앞에 서 있는 한 남자아이를.

하얀 얼굴에 길고 짙은 속눈썹. 우산도 없이 건널목에 서 있는 아이. 흰 바지에 빨간 가방을 메고 있는 그를 쳐다보았는데, 아이가 얼굴을 들어 날 쳐다보았다.

짧은 찰나에 시선이 마주쳤고, 그 아이의 눈. 슬프고, 마치 울고 있었다는 듯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그의 깊은 눈.


뒤를 돌아보니 괴한이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난 다급한 마음에 아이를 지나쳐 그대로 뛰어갔다. 길을 건너 근처 가게로 숨었고, 창문 사이로 빼꼼히 내려다보았다.

'뭐 하는 거야 바보. 도망쳐!'


아이를 향해 크게 외쳤지만, 그 아이는 힘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그리고 괴한이 아이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아이가 도망가는 찰나, 남자의 손에 붙잡혔고, 괴한은 서둘러 큰 자루에 아이를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루를 메고 어딘가로 향했다.


악몽을 꾸듯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


아이가 있던 건널목에는 빨간 가방이 주인을 잃어 덩그러니 버려져 있고, 폭우처럼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잦아들고 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마치 지금 본 모든 것이 꿈이기를.....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모든 것이 잊혀지기를 기도했다.

 







강렬한 한줄기 빛과 함께 난, 다시 회색 공간으로 돌아왔다.

승주와 무경이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대로 깨어나면 된다.

그런데 자꾸 날 뒤돌아보게 하는 마지막 상자.

'판도라의 상자' 열 수는 있지만 열어서는 안 되는 나의 감춰진 기억.


그 상자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난 끝내 뚜껑을 열었고, 그 안에 낡고 오래된 열쇠를 꺼내었다.

내 앞에 다시 문이 그려졌고, 난 그 문을 열었다.


그리고, 승주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예랑씨 그만 돌아와요. 심박수가 떨어지고 있어요. 돌아오세요."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문 밖의 세상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울창한 숲 속. 한 마리 사슴이 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다. 평화로운 모습. 길고 짙은 눈썹.

그런데 그때, 어딘가에서 화살이 날아와 사슴의 가슴에 박혔다.

놀란 표정으로 도망치는 사슴. 다시 날아와 가슴에 박히는 화살들.

결국 얼마 못가 쓰러지는 사슴의 눈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앞으로 사냥꾼이 다가오는데, 영상이 끊기듯 찢어진 필름처럼 화면이 구겨지며 사냥꾼의 얼굴이 보였다.

단단한 여자의 모습.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슴을 쳐다보는 그녀의 차가운 얼굴.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고, 귀의 감각이 마비가 되듯, 달팽이관에서 알 수 없는 '삐-'소리가 이어졌다.







"예랑씨!!"


얼마나 정신을 잃었을까.....

눈을 떠보니 승주의 얼굴이 보였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는 그녀.


"괜찮아요?"


주위를 둘러보니 병실 안이었고, 내 팔에 주삿바늘이 꽂혀있다.


"나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가 내 소매를 걷어올리며 혈압을 체크하더니


"마지막에 최면이 아니었어요."

"네? 그럼......."

"최면에서 각성상태로 넘어가며 의식을 잃었어요. 뇌파가 4Hz 이하로 떨어지는 델타파였어요."

"무슨 뜻이에요?"

"뇌종양이나 간질, 저산소상태에서 볼 수 있는 증상이죠. 깨어났으니 몇 가지 검사를 다시 해보는 게 좋겠어요."


주변을 둘러보는데,


"무경이가 밤새 예랑씨를 지켰어요. 미친놈처럼 밤새 소리를 질러대서 내가 쫓아냈어요."

"네?"


승주가 웃으며,


"농담이에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잠시 다녀온다고 했어요. 금방 올 거예요. 그럼 쉬고 있어요."


그녀가 뒤돌아 문을 열고, 난 그 뒷모습을 보며


"고마워요. 승주씨."


다시 뒤돌아 보며 방긋 웃는 승주.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치료를 해야죠."






납치당했던 얘기를 들은 무경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고, 승주는 비슷한 사례들을 예로 들며 상담치료를 권유했다.

무경이 날 잠시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은 원망이나 분노가 아닌 이해와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도 네가 아니라 나여서 다행이다. 그런 큰 일을 네가 겪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결국, 승주와 무경에게 사슴에 관한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희미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무경씨에게 난 정말 잘해야 해.'







크리스마스이브 날.


그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 무경의 집을 찾았다.

식탁에 근사하게 준비되어 있는 음식들.

날 보며 환하게 웃는 무경.


내가 가져간 꽃을 꽃병에 꽂고 그와 함께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내 잔에 와인을 따르던 무경이 가운데 메인 요리를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사슴 스테이크야. 특별히 유럽에서 공수해왔지."

"우웩!"


갑자기 토기를 느끼고, 소리를 지르자, 그가 물을 건네어주며


"왜? 사슴고기 싫어해? 이거 정말 어렵게 구한 건데."

"아니야. 괜찮아. 속이 좀 안 좋아서."


다시 자리에 바로 앉아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끝내 메인 요리를 먹지는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그의 품에 안겨 누워있었다.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던 그가, 자세를 바꾸더니 입을 맞추었다.

날 안아 올려 소파에 눕힌 그.

천천히 내 원피스를 벗겨내었고, 자신의 셔츠를 벗어 몸을 밀착시켰는데, 그의 애무가 뜨거워질 즈음, 정신이 아득해지며 어디선가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해서 눈을 뜨니, 무경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려보고 있다.


"뭐야, 자기 지금 코 골았어? 이 상황에서???"


난 입술에 흐른 침을 닦아내며,


"요새 피곤했나 봐. 입단 테스트가 얼마 안 남았잖아. 안 하다가 하려니까 온 몸이 쑤시는 거 있지."

"그래도 그렇지, 코를 골아? 크리스마스이븐데, 게다가 우리 첫날 보내려고 내가 얼마나!"


그가 화를 참으며 두 눈을 꾸욱 감았고, 난 그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오늘 하나랑 통화했는데, 피임해도 임신할 수 있데. 근데 그러면 나 안돼잖아. 곧 테스트도 있고, 그래서..."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보았지만, 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당분간, 스킨십만.... 그 이상은 안돼."


달래듯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자, 그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지금 나 고문해? 정말 나한테 왜 그래? 어? 전생에 도대체 무슨 원수를 져서 날 이렇게 괴롭히는 거냐고!"




 





국립현대무용단의 입단 테스트가 있던 날,

비공개로 진행된 그곳에서 난 붉은 눈의 남자를 보았다.

내 차례가 되어, 떨리는 가슴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무대. 다시 돌아온 이 곳.

무대 앞으로 나아갈 때, 그 남자가 있었다.

잠시 당황한 난 이내, 꼿꼿이 그를 응시하며, 당당하게 무대로 향했다.

날 지켜보던 붉은 눈의 남자는 내가 안무를 시작하자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그리고 해가 바뀌어, 난 무경의 집에서 그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가 매입하였던 연남동의 많은 건물들은 리모델링을 거쳐 작가와 아티스트들을 위한 뉴타운으로 바뀌어갔고, 동네가 밝게 바뀌자, 주변의 핫 스페이스로 떠올랐다.

그의 책 역시 오랜 시간을 거쳐 출간이 되었고, 국내에 이어 미주와 유럽에 소개되면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



지금도, 매일 새벽에 조깅을 한다.

내가 태어나 자랐고, 지금도 살고 있는 이 곳. 그리고 앞으로도 남은 삶을 살아갈 이 공간에서 난 지금도 여전히 숨을 쉬달리고 있다.

오늘도....




                                                                                - 끝 -





연재 시작해서 8개월 만에 드디어 끝이 났네요. 조용히 자축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다음 회에 '그녀의 덫' 에필로그와 함께 끝까지 지켜봐 주신 모든 분들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동안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덫' #3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