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프더레코드 May 09. 2022

[연재소설]전쟁의 기원

지어낸 이야기 3

 성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일하던 글렌이 갑자기 집안에 일이 생겼다며 창원으로 내려간 건 2009년 1월말이었다. 2월 정기 공연을 준비하고 있던 때라 보컬인 글렌이 빠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빌리가 "어쩔 수 없다"고 하니 우리는 잘 다녀오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글렌의 부모님이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시는지 몰랐다. 글렌은 언젠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작은 공장'을 운영하신다고만 했다.

 글렌의 부모님은 창원에서 직원 스무명 남짓의 정밀기계 부품 제작 공장을 20년 넘게 운영하고 계셨다. 당신이 기술자 출신인데다 특허도 여러 개에 있었고, 국산 가전 및 방산업체 등에 꾸준히 납품하고 있어서 지역 사회에선 강소기업으로 분류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2008년 여름부터 공장 분위기가 이상해지더니 그해 1월 중순부턴 급기야 제작 부장 2명과 중견급 기술직원 4명이 약속이나 한 듯 무단결근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산라인이 두 개인데, 이들이 동시에 사라지니 공장이 멈춰버렸다.

 글렌의 아버지는 출근을 않고 있는 직원들의 연락이 닿는 곳 어디나 수소문해봤지만 아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섯명의 가족들조차 연락이 안되니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글렌을 급히 호출했다.

 글렌이 창원에 내려가서 할 일은 여섯명 중 누구라도 만나서 무단결근의 이유라도 알아내야 하는 것. 내려간 지 일주일 쯤 지나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가운데 글렌의 아버지가 서류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작년 봄에 곱상하게 생긴 양복쟁이가 공장에 오더니 이걸 주면서 잘 생각해보라고 하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사람들이 벌인 일 같은데..."

 서류엔 신기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영업, 제작 등 공장 운영은 아버지가 그대로 하되 2009년 12월까지 대표권만 H-lake라는 법인에 맡겨두면 30억원을 준다는 합의서였다. 당시 글렌의 아버지는 '무슨 이 따위 사기를 치냐'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H-lake 관계자가 2008년 12월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왔고, 아버지도 처음엔 예의상 응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무시해버리셨다고 했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어. 왜 그런 이상한 계약을 하려고 하는지, 듣도보도 못한 대표권이란 걸 빌려주는데 왜 30억원이나 주겠다는 건지 설명을 안하더라고"

 글렌은 직원들을 찾다 찾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길버트와 커크에게 도와달라고 연락했다. 길버트는 3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를 연 뒤 다음엔 뭘할까 고민하고 있던 때라 머리도 식힐 겸 흔쾌히 승낙했다. 경찰인 커크는 길버트와 달리 직접 도와주는 대신 글렌에게 조언을 해 줬다. 커크의 조언과 도움이 사건을 풀어갈 수 있는 결정적 열쇠가 됐다.

 "그 직원들하고 가족들 휴대폰 번호 싹 다 나한테 보내봐. 은밀하게 통신 추적해 볼 테니까. 그리고 너(글렌) 은행 직원이잖아. 그 직원이나 가족들 중에 너네 은행에 주거래계좌 터놓은 사람이 한 명은 있지 않겠어? 현금 인출 내역이나 카드 사용 기록 찾아보면 흔적이 있겠지"

 이틀 뒤 글렌이 직장 동료에게 부탁해서 얻어 낸 금융기록을 통해 여섯명의 직원과 가족들이 모두 제주도에 H-lake가 이태 전에 인수했던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커크가 파악한 마지막 연결 기지국 정보와도 일치했다. 글렌 아버지의 감이 맞았던 것이다.

 글렌이 길버트와 함께 제주도에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아니다. 됐다. 내가 알아서 하마"라고 하시고는 H-lake 관계자에게 연락해서 "계약하자"고 하셨다.

 "부장 둘이랑 그 친구들 없으면 공장을 돌릴 수가 없어. 직원들도 다 알았겠지. 남은 직원들도 공돈이 들어온다는데 왜 마다하냐고 나를 어리석다고 하는데, 그래 뭐 공장이 망하기나 하겠어?"

 그런데 불과 1년 뒤, 글렌 아버지는 공장이 망하는 것과 다름없는 고통을 겪으셨다.

 H-lake는 글렌 아버지의 공장을 주가조작 소재로 활용했다. 철만 다루는 공장을 특수강으로 제작하는 원자력발전소 터빈 냉각기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라고 포장했고, 싸게 끌어모은 다른 회사들과 묶어 원전 건설에 필수적인 기계부품을 납품하는 유일한 정밀기계 중견기업 자회사로 둔갑시켰다. 물론 다 거짓말이었다. 예를들어 글렌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플라스틱 사출 업체, 여긴 세탁기나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부품을 주로 제작하는데, H-lake는 이 업체의 이름만 바꾸고는 원전 온도 측정 센서에 들어가는 필수 부품 제작 회사라고 소개했다.

 글렌 아버지는 "왜 이상한 짓을 하냐"고 항의했으나  H-lake는 "사업상 필요해서 그런건데 올해 연말까지만 있으면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H-lake는 2009년 3월 초 그렇게 부풀린 기계회사 집단들의 대표법인인 YH엔지니어링을 코스닥에 상장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대통령 UAE 순방 결과 40조원 규모의 원전 수출이라는 뉴스가 나왔고, 5000원이던 YH엔지니어링은 9월 초 6만원까지 뛰었다. 이어 H-lake는 차명 소유하고 있던 YH엔지니어링 주식을 순차적으로 전량 매도했고, 주식은 얼마 뒤 폭락하고 결국 허위 공시 등 법령위반으로 거래 정지가 되고 말았다. 철저히 차명으로 일을 진행한 H-lake는 쏙 빠져 나가고 중간 행동책 몇 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글렌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작은 회사들도 탈탈 털렸다. 수사당국은 H-lake가 주도했다는 사실을 뻔히 알 수 있었음에도 모른척 외면했다. 심지어 UAE 현지 사진에 H-lake 회장놈이 대통령 근처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말이다.

 작은 회사들은 피해를 본 투자자들의 협박과 고소에 시달렸고, 몇몇 업체 대표들은 독촉에 시달리다 자살까지 했다. 글렌의 아버지도 공장이 H-lake 작전 자금의 담보로 잡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결국 회사를 정리한 뒤 산으로 들어가셨다.

 앞서 받았던 30억원으로는 공장 밑에 깔려있던 부채를 갚고 기계를 보수했고, 남은 건 직원들에게 보너스로 나눠 주셨다고 했다. 직원 중에 잠적했던 6명은 H-lake에서 성공보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글렌 아버지에게 돈을 또 받아갔지만, 그 돈으로 YH주식을 샀다가 매도 타이밍을 놓쳐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작가의 이전글 [연재소설]Seek & Destro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