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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림 Sep 30. 2015

소음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다 옆집과 앞집 문 앞에 쌓인 택배상자들을 발견한다. 그 중 하나의 속이 궁금해진다. 뜻을 알 수 없는, 그래서 세련돼 보이는, 쇼핑몰의 이름이 박스 상피 조직 최상층에 박혀있다. 박스가 만들어졌을지도 모를 공장의 모습을 상상한다. 소음과 먼지로 가득했을 것이다. 기계들은 시간을 느낄 수가 없다. 시간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 수많은 기계들이 박스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어떤 기계는 상자의 틀을 잡았을 것이다. 어떤 기계는 상자를 잘라냈을 것이다. 어떤 기계는 피스톤 질을 하며 쇼핑몰의 이름을 상자 위에 권태롭게 찍었을 것이다. 같은 공간 속 다른 이들처럼 말이다. ‘그 박스를 집으로 들고 들어가 속을 확인한 다음 다시 테이프를 바르고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을까?’ 고민을 한다.

 지난 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을 설치고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 출근시간에 맞춰 울리게 한 알람 소리를 듣고 그대로 화장실로 향했었다. 노란 불빛에 검게 드리운 눈 밑 그림자가 얼굴을 더 안쓰럽게 보이게 했다. 하루 종일 피곤함을 느꼈다. 두 달 혹은 세 달 째다. 새벽 두 시나 세 시가 되면 매일 같이 노래 소리가 들렸다. 소음이다. 5층짜리 빌라 어디선가 시작된 소리는 새벽이면 온 몸을 쿡쿡 쑤시며 나를 괴롭혔다. 여름 한복판에 들어서 날이 뜨거워지고 덩달아 방 공기마저 무거워져 창문을 열어둬야만 했다. 덕분에 소음은 전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했다. 오늘같이 잠을 전혀 이루지 못하는 날이면 세상이 오늘 부로 끝나버렸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후가 되고 집에 돌아올 시간이 되면서 안정을 찾았다. 

 행여 누군가 들을까 도둑고양이 마냥 택배상자 쪽으로 발을 살금살금 땐다. 박스 표면에 마음이 동한 나머지 다른 집 문 앞까지 다가가 상자를 훑어본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 송장번호 같은 것들이 단단하게 들어차있다.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이의 것일 수도 있다. 이 정보들은 이 상자를 이곳에 도착하게 해줬다. 이름을 작은 소리로 읊어본다. 중성적인 이름이다. “정00, 정00......” 눈을 돌리는 순간 기억은 날아가 버린다. 간혹 내용물이 적혀있는 경우도 있다. 기대를 해본다. 다시 한 번 찬찬히 상자 표면에 붙어있는 작은 종이딱지를 읽어본다. 무엇이 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PAX DE... 라고 쓰여 있다. 알 수 없다. 그 혹은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어렵다. 

 ‘경찰이라도 부를까’ 그가 괴성의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내가 그렇듯 저 사람도 분명 회사에서 온 몸으로 스트레스를 받아냈을 거야. 그리고 그 화와 울분을 저렇게 포효로 풀고 있을 거야. 그렇게 상대를 이해하는 척 스스로를 위안했다. 온 건물을 들쑤시며 다닐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리가 정확히 어디서 시작되는지 몰랐고 덕분에 모든 방의 초인종을 누르며 확인하지 않는 한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의 혐의를 입증할 단서 따위는 없다. 심증뿐인 수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집에서 사방으로 끌고 다니는 의자 소리에 고생을 했다. 의자 바퀴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는 나를 분노케 만드는 최초의 소음이었다. 최대한 친절하게 쪽지를 써서 위집 문 앞에 붙였다. 그래도 소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건물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계단에서 마주한 모든 면상에 들리지 않는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저 놈인가, 아니면 이 놈인가’ ‘대체 집주인은 뭘 하고 있는 거지’

 빌라는 도무지 방음이 되질 않는다. 집 안에 현관문을 닫고 앉아있어도 밖에서 나는 소리가 모두 들린다. 슬리퍼 끄는 소리,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사람의 말소리, 여자와 남자가 함께 내려가는 소리. 심지어 다른 집 안에서 나는 통화소리까지 들린다. 집은 사방이 꽉 막힌,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이다. 하지만 지금 내 방은 은밀하지 않다. 그래서 숨죽이며 살아가야한다. 혼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눈앞에 있는 상자의 주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도 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다. 나 역시도 소음 공해 용의자다. 피해자이면서 용의자다. 가해자일 수도 있고.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나와는 상관없다. 무엇이 들었는지 관심 끄자.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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