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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림 Oct 13. 2015

그 여자 그 남자의 사정

 장마철 공기는 물을 잔뜩 머금고 도무지 뱉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1년 중 이시기가 오면 사람들의 몸은 무거워지고 옆 사람과의 관계 역시 녹 낀 경첩 마냥 삐걱거린다. 이 밤의 기해(氣海)를 시원하게 한 번 짜버리고 탈탈 털어 햇볕 녘에 걸어둘 수 있다면. 

 집 앞 지하철 1번 출구에 난 계단을 털털 거리면서 내려간다. 앞서 가는 여자의 더딘 걸음걸이에 나마저 느려진다. 그녀는 5개의 단을 내려가더니 갑자기 멈춰 선다. 다른 생각을 하다 갑자기 멈춰선 여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부딪히지는 않았다. 부딪혔다면 앞으로 함께 고꾸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크게 다쳤을 것이다. 

 어깨 너머로 상대의 핸드폰이 눈에 들어온다. 손가락으로 말을 쏟아내고 있다. 어깨에서 시작된 열이 머리끝으로 빠져 나가며 순간 온 몸에 냉기가 돈다. 화가 난다. 속에서 온갖 욕지거리들이 난동을 피운다.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는다. 폭발하지 않았다. “아 씨” 혼자 중얼댔다. 내가 이름 모를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비난이다. 상대에게 이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여자는 귀를 틀어막고 있다. 여자는 자신 때문에 방금 무슨 일이 생길 뻔했는지 알아야한다. 여자를 추월하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는 울고 있다. 여자의 사정은 알 수 없다. 

 식당과 술집들이 사이좋은 척하며 늘어서있는 골목을 걷는다. 가게들은 조화를 이룰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제각각인 간판들과 조명 빛들은 그 의지를 분명하게 한다. 

 누군가 내 어깨를 친다. 방금 순댓국밥집을 막 지나친 참이다. 순댓국에 밥을 말아 한 상 거하게 먹고 소주까지 한 병 들이켰을 것이다. 냄새로 추측을 뒷받침한다. ‘오늘 이상하다’ 하루 종일 나쁜 일도 없었다. 몸은 무거웠지만 오히려 좋은 날이다. 하필 집에 들어가는데 방해물들이 많다. 괜찮은 음악을 들으며 거리에 소음을 지우고, 어서 집에 들어가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한 바탕 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어깨를 친 사람은 어느 덧 나를 앞 서 걸어 나간다. 아니 양 쪽을 목발을 짚고 앞으로 나간다. 목발을 짚는 것도 ‘걸어 나간다’는 말로 표현이 가능한가. 이 남자는 흰 뿔테 안경을 썼고, 하얀색 민소매를 입었고, 빨강, 초록, 파랑의 색들이 규칙 없이 칠해져 있는 바지를 입고 있다. 바지 한 쪽은 공중에서 펄럭이고 있다. 한 쪽 다리가 없다. 이 남자의 사정은 알 수 없다. 남자는 가는 길을 틀어 노래방으로 들어간다. 노래방의 경사는 가파르다.

 집에 가자.

http://www.gyeganji.com/2015/10/12/%EA%B7%B8-%EC%97%AC%EC%9E%90-%EA%B7%B8-%EB%82%A8%EC%9E%90%EC%9D%98-%EC%82%AC%EC%A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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