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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관우림 Oct 19. 2015

은행

지난밤 비가 내렸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노란 은행들은 비와 함께 땅으로 떨어졌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밟아 댔는지 과육은 여기저기 삐져나와 바닥을 물들였다. 나무의 열매와 이파리와 비가 뒤 섞여 짜내는 냄새는 비릿하기만 하다. 대원들은 냄새나는 이 길을 지키고 섰다. 이 길은 파란 기와의 큰 집으로 향하는 수많은 길 중 하나다. 그리고 그 큰 집에는 최고의 권력자가 살고 있다.
아침때가 지나자 이반이 큰 대야를 들고 나타났다. 이반은 대장이다. 움푹 들어간 그의 눈은 광대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크지 않은 키와 마른 몸은 그를 어딘지 병약하게 보이게 한다. 대원들 앞에선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를 곧추세워 대장의 위엄을 보이려 한다. 하지만 수십 년간 권력자들 앞에서 엇갈리게 포갠 양손은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듯하다. 한 번은 사무실에서 졸고 있다 중대장의 순찰 소식을 듣고 맨발로 뛰어나가 경례를 한 적도 있...다. 이반은 자신의 권력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가 지키는 길로 말미암아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반 드미뜨리치 체르뱌코프는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에 나오는 말단 관리다. ‘이반’은 어느 날 극장에서 재채기를 했고 앞에 앉아 있는 장군의 머리에 침을 튀기고 만다. 장군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그는 장군이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반’은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찾아가 사과를 한다. 그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를 단죄한다.
“오전에 근무 없는 대원들은 은행을 줍는다. 이상!” 이반은 길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보고 그 속 은밀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씨를 생각했을 것이다. 왁스를 발라 놓은 듯 윤기가 있고 적당히 끈기가 있으며 초록빛을 띄는 낱알을 말이다. 땅바닥에 뒹구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의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진입로를 깨끗이 치우면 원수님도 좋아하실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반은 대원들을 감시하러 나와 한 번씩 얼굴을 비췄을 뿐이다. 그는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통화를 하고 이따금 서류처리를 했다. 먼저 대야를 채운 대원들은 옥상으로 향했다. 은행을 냄새나지 않게 씻는 일까지 이반이 시켰기 때문이다. 대원들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물컹한 과육을 으깼다. 끈적거리기도 했다. 발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발로는 할 수가 없었다. 나무 열매는 노란 즙이 세어 나가는 동안 악취를 만들어냈다. 천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냄새지만 사람들에겐 이마저도 통하지 않는다. 다만 식물의 작전이 들어 먹힌 것은 세척과정 중에 염증이 생긴 대원도 있다는 것이다.
이반은 냄새가 사라진 은행 열매를 포댓자루에 나눠 담았다. 제 몫을 얼마간 떼어놓고 자신의 상사들에게 보냈다. 대원들은 평생 맡을 악취를 모두 들이킨 듯싶었다. 하지만 대원들의 입속으로 들어간 나무 열매는 저녁밥 위에 하나씩 올라간 것이 전부였다. 이반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자신의 밥 위에 탐스럽게 올라가 있는 다섯의 은행알을 보고 느닷없이 소리 냈다. “오늘 너희가 한 것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니야. 다 너희를 위한 일이지.” 정확히 어딘지 모를 사투리 억양이 섞여 있다.
대원들은 반응이 없다. 표정도 없다. 이따금 몸 여기저기에 들러붙은 비린내를 찾아 킁킁거리고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이반은 네 번째 알을 막 집어먹었다. 그는 기분이 모호해 짐을 감지했다. 방금 전까지 상쾌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심장은 이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크게 움직였다. 이반은 물을 들이켰다. 그러면 다시 좋았던 기분을 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몸이 뜨거워졌고 땅이 흔들렸다. 이반은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렸다. 속에 있던 은행들이 변기 안으로 쏟아졌다.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을 먹은 것인가. 그는 화장실 바닥에 누워 경기를 일으켰다. 덕분에 대원들은 저녁 시간마저 대장을 위해 써야만 했다.
이반이 병원에 가 있는 사이 그의 자리에 공백이 생겼다. 대원들 중 가장 오랫동안 이 경비대에서 근무한 대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이반의 모든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긴 것도, 소심하고 이기적이고 힘을 좋아하는 성격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오늘 작업 중에도 끊임없이 이반 욕을 해댔다. 이반이 대장이기 때문에 섬기는 척할 뿐이다. 그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어깨를 폈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허리를 곧추 세웠다. 그런데 그의 양손은 여전히 앞으로 엇갈리게 포개어져 있다.


#은행  #계간지 #임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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