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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댓츠올 Sep 06. 2023

내 손끝에 푸르게 번지는 청춘

강원도 원주 뮤지엄산

서울 사는 사람인 내게, 강원도 원주는 멀고도 가까운 도시다. 부산에 간다고 하면 벌떡 일어나지는 몸이 강원도 원주에 간다고 하면 왜 이렇게 느적대고 망설여지는지. 실은 알고 있다. 적당히 가깝기 때문이다. 

부산에 간다면 1박 2일을 다녀오자 하며 미리 기차 예매도 하고 숙소 예매도 하고 준비 단단히 하고 떠났을 테지만, 강원도 원주라니 KTX 타고 금방인데 뭐, 하면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미 몇 번이고 가본 도시라서 망설여졌다. 이미 아는 곳인데 굳이 가봐야 하나? 하면서도 무릎을 짚고 무거운 몸을 일으킨 건, 원주의 '뮤지엄 산'은 한 번도 못 가본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에 관해 이런 철칙을 가지고 있다.

한 번도 안 가본 곳은 빨리 다녀와 봐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또 갈 수 있으니까.

좋으면 또 갈 수 있고 별로면 와 봤으니 됐다 하면 된다.

정말 좋았던 곳은 두 번은 가 봐야 하니까, 그 한 번을 빨리 경험해야 한다.



뮤지엄 산은, 원래 종이박물관이 있던 자리에 한솔문화재단이 미술관을 설립하며 합쳐진 곳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건축을 맡은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에 미술관, 페이퍼갤러리(종이박물관), 제임스터렐관, 명상관 등이 있고 이를 통틀어 뮤지엄 산으로 불린다. 지도를 보니 오크밸리 내에 있어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성이 좋지 않기에 뚜벅이가 가기에는 허들이 높아서 매번 주말이면 갈까? 말까?를 거듭하다 안 가기를 반복하던 곳이기도 했다. 언젠가 친구가 회사 워크숍으로 다녀왔는데 너무너무 좋았다며 추천한 곳이기도 했다.


마침 올해 뮤지엄 산에서 <안도 타다오의 청춘> 전이 열리고 있다고 해 이참에 가보자 싶었다. 이곳을 설계한 사람의 전시라니 더욱 뜻깊을 것 같았다. 원래 전시기간은 2023년 4월 1일부터 2023년 7월 31일까지였고 7월 15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그의 강연까지 듣고 나자 정말 꼭 가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현재 기간이 연장되어 2023년 10월 29일까지 열린다. 추석쯤 근처를 지난다면 들러보면 좋을 듯하다.)



한 번을 간다면 제대로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통합권을 사서 제임스터렐관도 보고, 명상관도 체험하고, 카페에서 차도 마시고... 확실하게 해야 하는데... 상상 속에서 계획은 첨예해져 갔으나 이상하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안 움직이면서 가는 방법은 맨날 검색을 해댔는데 그에 따르면,


(서울 사는) 뚜벅이가 뮤지엄 산을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뮤지엄산 셔틀버스 이용

전시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이 셔틀버스는 시청역, 종합운동장역 두 개의 출발 노선으로 운영된다.

주중 주말 노선이 다르지만, 위의 두 정류장에 정차하고 가격은 성인기준 35,000원.

주중에는 한 버스가 시청-종합운동장을 거쳐서 가고, 주말에는 두 대로 운영된다고 한다.


예매처: https://smartstore.naver.com/guidelive/products/9094771862


KTX 왕복 승차권 + 지하철비 + 시티투어 버스 비용 등을 고려했을 때, 조금 비싸긴 하지만 내 자리 확보가 가능하고 버스를 타고 한번에 이동 가능하다 점에서 시간이 절약된다. 하지만 블로그 이용 후기를 봤을 때, 셔틀 이용 시 도착시간은 약 12시 정도인데 이럴 경우 당일 현장 예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제임스터렐관과 명상관 이용이 어렵거나 늦은 시간대만 남아 있어 아쉬웠다는 후기도 있었다. 

기껏 갔는데, 두 장소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았다.


2. KTX 혹은 시외버스를 타고 원주역/터미널에 도착 후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


*시티투어 시간표 안내(2023 기준)

https://www.museumsan.org/museumsan/guidance/view.jsp?m=5&num=77&s=1&idx=7602


KTX를 타고 원주역(혹은 만종역)으로 가, 9시 30분에 원주역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면, 뮤지엄 산에 오차야 있겠지만 10시 28분에 도착한다. 뮤지엄 산 오픈시간이 오전 10시니까 이때 도착하면 제임스터렐관과 명상관의 이용권이 남아 있을 테고 돌아가는 시간도 비교적 자유로우니 통합권을 구매해서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순으로 9시쯤 원주역에 도착하려면 8시 10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면 얼추 가능했다. 그러나 청량리 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타려면(원주로 가는 KTX는 청량리 출발만 있다...) 몇시까지 일어나서 몇시까지 출발하고... 생각하다 보니 솔직히 귀찮았다.


그래서 상상만으로 뮤지엄 산에 여러 번 왔다 갔다 여러 차례 반복했던 것 같다.


가깝고도 먼 뮤지엄을 지척에 두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부모님께서 서울을 방문한 것이다. 부모님과 즐거운 주말을 보낸 뒤, 내일 아침에 내려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득 원주가 생각났다. 본가에 가려면 교통의 요지 원주를 반드시 지나쳐 가야 했고 통화를 하다가 원주쯤 왔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기도 해서, 그러면 내일 내려가는 길에 나랑 뮤지엄 산에 가서 관람하고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은 뒤 부모님은 본가로 내려가고 나는 터미널에서 버스 타고 서울로 올라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부모님께서도 너무 좋다고 하셔서, 다음날 아침 8시에 원주를 향해 떠났다.

벼르고 벼른 것에 비하면 아주 허무한 출발이었지만 때로는 이런 기회도 잘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뮤지엄 산에 도착한 건 10시 30분경이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그 시간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제임스터렐관과 명상관의 티켓도 남아 있긴 했는데 오래 머무르긴 어려울 것 같아 통합권 대신 기본권만 구입해 관람했다. 생각해 보니 잘한 선택이었던 게, 통합권을 구매했으면 마음이 조급해져서 느긋하게 관람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정말 인생은 계획대로 안 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같다. 게다가 난 P라서 하루에도 몇 번씩 계획을 뒤집어 엎는 편이다.


뮤지엄 산 입구. 푸른색 사과 조형물은 안도 타다오의 작품이다. "살아 있는 동안은 모두 청춘"이라는 말로 이 작품을 설명했다.


입구의 조형물은 알렉산더 리버만의 <아치웨이(Archway)>이다. 좌측에서 순서대로 아치웨이, 삼각코트, 백남준홀
뮤지엄 산의 야외의 스톤가든, 신라시대 고분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다.


안도 타다오의 청춘 전시회는 그의 건축 작품들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나타내주는 조형물과 사진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간 강연회나 책을 통해 읽어보기도 한 것들이 작은 모형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미술전을 보듯이 작품 하나하나를 본다기보다는 각각의 섹션을 통해 그의 건축물에 대한 맥락을 이해한다는 면에서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각각의 공간에서 그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시도들을 했는지, 특히 물과 빛 바람과 같은 자연의 공간을 살리기 위해 안도 타다오가 구성한 건축물의 구조를 감상하면 뮤지엄 산이라는 공간도 좀 더 풍성하게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삼각 코트의 경우에는, 안에 커다란 돌들이 놓여 있고 그곳에서 파란 하늘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코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 옆에 커다란 방석들이 놓여 있는데, 그걸 하나 들고 가서 앉아 뻥 뚫린 하늘을 바라보니 마음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안도 타다오의 작품이라면 '빛의 교회'가 널리 알려져 있을 텐데 이번에 뮤지엄 산에도 비슷한 공간이 생겼다고 한다. '빛의 공간'으로 뮤지엄 산에 들어가기 전 길의 초입에 있다. 그러니까, 아치웨이에 다다르기 전. 내가 갔던 7월에는 아직 개관하지 않아 외관만 슬쩍 보고 안쪽은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열렸다고 하니 다음에 제임스터렐관이나 명상관을 함께 관람할 때 같이 보고 오면 좋겠다... 며 다음을 기약했다.


8월 1일에 개관한 빛의 공간. 이미지출처: 뮤지엄산 홈페이지


첫 번째 명상관이 구형 공간에서 빛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이번에 개관한 빛의 공간에서는 십자 조각으로 된 빛을 마주할 수 있다고 한다. "□와 ○, 정(靜)과 동(動), 긴장과 개방. 쌍을 이루는 명상 공간"이라는 홈페이지의 설명이 인상 깊었다. 




미술관 외에 종이박물관도 함께 관람해 보았는데, 여기서도 볼 게 많았다. 박물관 특성상 종이의 역사나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과정, 옛 조상들이 지닌 물품에서 신발이나 옷 보관함 등을 비롯해 종이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이렇게 많은 줄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부모님께서 좋아하셨다.


미국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의 작품 <제라디 맨리 홉키스를 위하여(For Gerald Manley Hopkins)>


푸른 사과 한쪽에 작게 적힌 글귀 "영원한 청춘에(永遠の青春へ)"와 서명

7월 15일 강연에서 안도 타다오는 뮤지엄 산에 있는 이 작품에 대해 설명하며, 이 사과를 한 번 만질 때마다 1년씩 더 수명이 길어지니 만져보고 가라고 했는데, 어떤 후기에서는 만지려고 하면 제지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무튼, 건축가의 의도는 이 사과를 만져보라는 거였는데, 그러면서 "나이와 관계없이 살아 있다면 모두 청춘"이니 청춘을 즐기라고 했다.


어쨌든 함께 간 부모님과도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복서 출신에 독학으로 무수한 책들을 읽고 건축가가 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암 투병을 하며 다섯 개의 내장을 드러냈대,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 있다고, 살아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며 늘 청춘으로 살라는 걸 강조하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우리끼리 사과 앞에서 사진 한 장씩 찍었다. 햇볕을 가득 받은 사과는 싱그럽기보다는 아주 뜨거웠지만 그 또한 청춘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내 손에 전해진 이 열기처럼 엄마와 아빠의 손에도 그런 에너지가 전해졌기를 바랐다.


뮤지엄 산은 외따로 떨어진 탓에 접근성이 좋진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고요하고 한적했다. 더불어 탁 트인 경치를 볼 수도 있어 잠시나마 시계가 맑아지는 듯했다. 안도 타다오의 의도에 따르면, 사람들이 직접 찾아오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다고 하는데 그 의도가 확실히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고.




내려오는 길에 막국수와 수육을 곁들여 점심을 먹었고 부모님은 본가로 나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래도 오후 5시쯤 집에 도착했으니, 걱정하고 염려한 것에 비해서는 가뿐한 여행이었던 셈이다. 뭐든 해 봐야 알 수 있다는 걸 다시 깨달은 셈이다.


애써 찾아간 곳에서 잠시 마음 누일 수 있는 공간을 만나서 좋았다.

나도 덕분에 이렇게 찾아와서, 다음을 다시 한 번 기약할 수 있을 것 같고.

여름에 이토록 싱그러운 산은 가을에는 새 옷을 갈아입고 더욱 화려한 색채를 빛낼 것이다.


전시는 이미 봤으니 10월 29일 이후에 이곳을 찾게 되더라도 제임스터렐관과 명상관 그리고 새로 개관한 빛의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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