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자연 속에 풍덩 뛰어들었지
직장인은 여행을 떠날 때 아주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해외여행 플랜은 짧게 중국이나 일본 등 가까운 나라에 다녀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2년에 한 번은 유럽으로 길게 여행을 다녀오는 것으로 정해졌다. 추석 연휴를 끼고 길게 휴가를 붙이면 어렵게 2주 정도의 휴가가 나오니 시기도 주로 그때로 고정되었다.
프랑스에, 이탈리아에, 동유럽에 순차적으로 다녀온 뒤 그 루틴에 맞추어 2020년 가을쯤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여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항공권을 알아보던 차에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펜데믹이 막 시작될 즈음, 아이슬란드와 태국에 여행을 떠난 지인들이 귀국길이 막히기 전 안전하게 들어왔다. 그 후로 우리는 화상 회의를 통해 조촐한 파티를 할 때마다 "코로나 이전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해외여행은 어디였어요?"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난 여행을 그리워했다.
그후 몇 년이 흘러 오랜만에 밟은 유럽 대륙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이렇게 사방이 조용하고 자연뿐인 여행도 오래간만이었다. 한겨울에 떠나는 여행도.
이곳에서 우리는 낯선 타인과의 교류보다는 여행지가 주는 시선과 고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했다.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어딘가에 멈춰서 사진을 찍었고, 금세 휘발될 만한 수다를 떨었으며, 고개를 돌아봐도 온통 설산이 보이는 경이로움에 눈을 크게 떴다가도 계속 이어지는 길에 노곤해져 눈을 붙이기도 했다.
북국여우가 남긴 발자국을 보고선 잠시 차를 세운 채 다시 여우가 나타나주길 한참 기다렸고, 말들이 모여 있는 목장 근처에서 당나귀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운 자극도 반복되면 곧 익숙해지는 모양인지,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부터 잠시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에 소홀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곧 새롭게 보이는 설산과 하늘의 풍경에 뒤늦게 탄성했다.
매일 밤 오로라 스폿을 찾아 숙소를 옮겨 다녔다.
각각의 숙소가 모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곳은 산중에 있어서 시설은 협소했지만 오로라를 보기에 좋았고, 어떤 곳은 집 자체가 크고 넓어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며칠 더 머무르고 싶었다. 또 어느 마을은 참 소담하고 단정해서 언젠가 이 집에 한 2주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도 품었다.
아이슬란드에 오면, 아이슬란드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가라는 문구가 안내책자에 적혀 있다.
아이슬란드가 가진 것을 모두 다 보려고 욕심부린 것은 아니었음에도, 아이슬란드는 내게 많은 풍경을 넘치게 보여주었다. 이전에 본 적 없던 풍경들. 겹겹의 색깔로 흘러가는 오로라도, 설산도, 피오르드 협곡도, 시원하게 내리 꽂히는 폭포도, 게이시르 간헐천에서 솟아오르던 물줄기도, 서늘하고 미끄덩거리던 얼음동굴도 모두 기억에 남았지만, 아직도 종종 생각나는 것은 그곳을 걸어가던 나의 그림자다.
주변에 커다란 건물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해가 낮게 떴다가 이내 지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아이슬란드에서 나의 그림자는 유난히 좁다랗고 길었다. 서울에서는 해가 저무는 시간에 한강변을 걸어갈 때만 볼 수 있던 그림자를, 그보다 몇 배는 더 커다란 그림자를 여행 내내 마주했었다.
나는 내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곳에서는 원 없이 볼 수 있었던 점이 좋았다.
어느 건물과 어느 도로에 굴절된 그림자가 아닌 그저 직선으로 기다랗게 뻗어있는 그림자. 하얀 언덕을 외롭게 올라가다가도 고개를 돌아보면 내 키의 스무 배 정도는 되는 그림자가 길게 누워 나와 동행하고 있었다. 내 발끝에 꼭 붙은 채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점도 좋았다.
폭포를 보러 가기 위해 눈길을 걸어가는 길이 때로 지루해지는 때에는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 "여기로 모여봐" 외치며 좌표처럼 손을 들었다. 우리는 그 손끝을 향해 쪼르르 몰려들어 기다란 그림자나, 비슷한 간격으로 놓인 그림자의 형태를 찍었다. 평소엔 할 엄두가 나지 않는 개다리 춤이나 하트 포즈 같은 것을 영상으로 남기기도 했다. 내가 하는 것이지만, 내가 아닌 그림자가 표현해 주는 듯해 조금 수줍더라도 괜찮았다.
"여기로 모여봐!"
그 말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혼자서도 은밀히 혼자만의 그림자를 찍었으리라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옆에 놓인 그림자가, "이래도 안 찍어?" "나랑 사진 안 찍을 거니?" 말을 걸곤 했으니까. 그러나 어딜 가나 발끝에 꼭 붙어 있던 내 그림자는,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쯤엔 내 발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이 장면을 한동안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섭섭했다.
내가 떠난 아이슬란드에 혼자 남아 내가 다녀간 산과 들판을 신나게 쏘다닐 내 그림자를 상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이상하게도 아쉽고 섭섭하고 외로웠다.
돌아온 뒤 아쉽고 섭섭하고 외로워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 시간을 더 꽉꽉 채워 보내려 했다. 기다란 다리를 보며 내 짧은 다리를 더 크게 뻗으면 거인은 더 큰 다리를 길게 뻗었다. 기다란 팔도 같이 허우적거렸다.
어느 평원을 다녀올 때는 거인을 옆에 두고서 있는 힘껏 질주했다. 카메라를 든 채 뛰어서 내 움직임에 따라 화면이 마구 들썩였고 헥헥 거리는 숨소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멈춰 선 뒤에는, 아직도 숨이 차 헐떡거리면서도 내 행동이 재미있어서 아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아하하! 웃으면 웃음 소리는 어느 공간에 고여 있지 않고 저 멀리로 멀리 퍼져나갔다. 그것은 마치, 너는 이렇게나 커질 수 있고, 이토록 힘껏 달릴 수 있고, 이만큼이나 크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았다. 나에게 수많은 감정이 있다는 걸 알게 해주고 잃어버린 활기를 되찾게 해주는 감각에 온몸에 좋은 기운이 솟아났다.
어떤 상황에서든 안으로 안으로 수렴하는 것이 습관이 된 내게 이렇듯 밖으로 퍼져가는 환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아이슬란드의 자연 풍경은 그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보내버린 것들은 멀리 퍼져서 끝내 돌아오지 않는 땅.
흘려보낸 것들은 한 줄기 바람과 함께 저편으로 사라지는 곳.
어디서든 내가 갈 수 있는 만큼만 동행해 주던 나의 커다란 그림자.
모든 것이 나보다 절대 앞서가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는 그 안정감이 좋았다. 괜히 독려하며 등을 떠밀지도 않고 팔을 뻗으며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저 한쪽 편에는 낮게 뜬 태양을 두고 다른 한쪽 편에는 거인을 데리고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는 길만이 존재했다.
친구들 또한 몇 걸음 앞서 걷거나 몇 걸음 느린 속도에 타박하지 않고, 각자의 속도로 눈길을 걷고 검은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고, 폭포의 강렬함에 감탄했다. 그리고 옆에는 늘, 나의 속도와 나란한 내 그림자 거인, 그 기다란 친구가 든든하게 함께해 주었다.
게이시르
아이슬란드에서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로 10-15분마다 온천수를 강력하게 내뿜는 간헐천이다. 주위로 사람들이 둘러 모여 마그마에 의해 물이 데워져 폭발하는 순간을 기다리는 수런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물이 솟아오르면 여기저기서 탄성이 들려오고(!) 뿌연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나면 다시 수런거리며 다음 폭발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