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을 버려야 한다면 여기가 딱이다
사람에 따라 끌리는 자연 풍경이 다르다는 사실에 종종 놀란다.
어떤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바다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별밤을 좋아한다. 산보다는 숲이 좋다든가 바다보다는 강이 좋다거나 하는 세세한 호오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잘 깨닫지 못했는데 최근 이사 갈 집을 구하려 여러 동네를 돌아다니다 내가 산보다는 물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같은 조건이라면 바다나 강이 있는 쪽이 더 좋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친구는 “나는 물을 보면 우울해지고, 산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라고 대답해 주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왜냐면 나는 정반대로, 너무 산만 있으면 뭔가 가로막고 있는 듯해 답답해지고 바다를 보면 흐리든 밝든 환한 에너지를 얻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어릴 적 산골에서 살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전에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고 새로운 곳을 여행하기에 바빴는데 이 일을 계기로 내가 좋아하는 여행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굴포스는 게이시르를 지나서 있었다. 폭발하는 간헐천을 본 다음이라, 다른 곳의 풍경이 눈에 차려나 싶던 차에 자꾸만 높은 곳으로 올라가던 차가 멈춰 섰다. 너무 높은 곳에 올라왔다고 느낀 건 귀가 먹먹해져서였다. 막히는 귀를 계속 뚫어가며 높이 올라갔더니, 온통 하얀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날카로운 바람이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차에서 내렸을 때, 굴포스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으나 막상 걸음을 내디뎌보니 아이젠을 단단히 착용해야 했고, 꽤 높이 올라가야 했다. 쿠*에서 최저가를 주고 산 값싼 아이젠은 몇 번이나 얼음에 파묻혀 내 진로를 방해했다. 몇 걸음 걷다가 아이젠을 벗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얼음을 탈탈 털어내주고 난 뒤 다시 착용하기를 반복했다. 수행하듯 묵묵한 반복이었다. 아이젠이 없는 것보단 확실히 나았지만(없었다면 아예 올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좀 더 좋은 것을 살걸 하는 후회가 뒤늦게 몰려왔다.
그래도 한 걸음씩 끌어모아 계속해서 올라갔다. 끝내는 뭐가 있는지 궁금하단 생각이 들었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더 매섭게 불었다. 풍속보다 더 위협적이었던 것은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였다. 그렇게까지 찢어지는 소리는 참 오랜만에 들었고 아주 위협적이었으며 그런 날 선 배경에 반해 바닥에 쌓인 하얀 눈밭은 햇볕에 반사되어 너무 눈이 부셨다. 눈을 채 뜨지 못할 것처럼 눈부신 하얀 눈밭. 미끄러지지 않기 위한 조심스러운 한 걸음들.
끝까지 올라가 봐야 뭐가 있겠나. 절벽이 있겠지. 절벽을 보면 뭐가 달라지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저 궁금했기 때문에.
거기가 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아무튼 절벽까지 다다르자 커다란 폭포와 너머의 설경이 보였다. 바람 소리는 여전히 찢어질 듯했으나 그 바람에 지쳐 나가떨어질 것처럼 소리쳐대는 사람들의 환호 혹은 비명도 함께 들렸다. 사람들은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최대한 절벽 가까이로 가 사진을 찍었다. 어떤 경계로, 성향에 따라 더 가까이 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었다. 나는 모험을 하지 않는 쪽이었다. 위험할 정도까지 갈 엄두도 나지 않아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광활한 자연 속이라지만 안전장치가 없는 데다 바람도 많이 불어 자칫 사고가 날 것 같아 보였다.
“다들 담이 크네.”
내 중얼거림에 귀도리 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친구가 절벽 가까이로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의외로 여기서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대.”
그 말이 어쩐지 서늘하게 느껴지면서도 시야로는 시원한 기분을 만끽했다. 친구의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이 절벽을 배경으로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수십 가지의 파국적 상상을 마친 뒤 생각을 갈무리했다. 때로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고 나면 세상이 평범하다는 사실이 기껍다.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높은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탁 트인 시야, 그리고 폭포 너머에는 이름 모를 하얀 대지가 보였다. 나는 사슴을 좋아하는 편이라 너머의 하얀 눈밭에서 겨울을 지나는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서로 눈빛 교환을 하는 상상을 했다. 북극여우도 아니고, 사슴이 이 계절에 이런 곳에 있을 리 없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니 약간 짜릿했다. 그건 추위와 두려움과 막막함과 시원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데서 오는 감각이었다. 추위에 떨면서도 동시에 시원하다는 기분을 느낀 건 살을 엘 듯한 표피와 달리 속에서는 꽉 막혀 있는 답답함을 내내 느끼고 있어서였다. 탁 트이는 풍경을 보고서야 나는 한국에서의 내가 그간 계속해서 실체가 없는 답답함과 미약한 우울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을 살고 나서는 어제의 빈 껍데기를 수습해 독려하는 데 반나절을 쓰며 또다시 내일을 향해 가는 듯한 일상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스스로를 꽤 좋아하면서도 그걸 납득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때야 깨달았다.
절벽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보는 동안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들이 쓸려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귀에서 들리는 소리는 폭포가 쏟아지는 소리인지 바람이 할퀴는 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찬물로 세수를 하듯 정신이 들었다. 무언가 쏟아져내리는 풍경만 봐도 파도처럼 밀려나가는 것이 있다. 약간 눈물이 날 것도 같았는데 그게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인지 속에서 밀려 나간 찌꺼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한결 후련해졌다. 하루가 지난 뒤면 사라질 감각일지라도 제법 괜찮은 경험이었다.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가던 중에 절벽 너머의 풍경을 잠시 돌아보았다.
누군가 거기서 나를 응시하고 있을 것만 같은 감각. 그건 사슴이 아니라 어제의 나였을까.
당연히 아니겠지만, 아무것도 없었다면 생각한 대로 되는 저편의 세계도 있는 법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하곤 뒤돌아 절벽을 내려왔다.
굴포스
Gullfoss. ‘황금폭포’라는 뜻을 지녔다. 해가 비치는 순간에 폭포가 금빛으로 빛나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3단으로 떨어지는 거대폭포는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흐른다고 하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 얼어붙어 있어 오히려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