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느긋 Nov 12. 2024

얼음섬은 저마다 홀로 둥둥

빙하가 녹아 있는 위스키의 맛

“준비됐어?”

“물론이지.”


우리는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멀리서 검은해변과 그 위로 빙하 덩이들을 늘어 선 장면을 발견하자마자, 우리는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바로 아이슬란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블로그 글을 닳도록 읽으며 꼭 한번 체험해보고 싶었던 것, 빙하 넣은 위스키를 온더록으로 마시는 것이었다.


친구가 출국하는 공항에서 좋아하는 위스키를 한 병 샀고,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뒤 다 함께 공항면세점에서 보드카를 샀다. 일반 마트에서 사면 술값이 엄청 비싸니 반드시 면세점에서 구매하라는 신신당부를 여러 번 봐서, 마트에서 술을 사면 정말 큰일이 날 거란 생각에 맥주며 보드카를 최대한 많이 챙겼던 것이다. 


우리는 저녁식사 후 맥주 한 캔씩을 비우면서도 정작 도수가 높은 술은 열지 않았다. 숙취로 인해 다음날 일정이 힘들 수 있다는 염려와 도수가 높은 술은 아이슬란드 빙하를 넣어 온더록으로 희석해 먹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꿀팁을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그럼에도 처음 다이아몬드 비치에 도착했을 때는 빙하 위스키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는데 어쩜 이럴 수 있지? 싶지만 ‘저게 뭐야?’ 하는 탄성과 함께 멀리서 떠내려온 빙하가 모인 요쿨살론의 에 압도되었기 때문이었다.


‘빙하호수’라는 뜻의 요쿨살론은 태초의 모습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내가 학습해 온 세상의 풍경과 이질적이었다.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으적으적 금이 간 채로 트래픽잼에 걸린 것처럼 그곳에 정박해 있었다. 떨어져 나온 빙하는 이곳에서 천천히 녹으면서 호수를 채워갈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서 이번에도 아이젠을 몇 번이나 고쳐 신다가 유독 반들반들해 보이는 경사에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절대로 넘어지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면 꼭 한 번은 넘어지고야 마는 나다. 그날따라 햇빛이 따사로워 어느 지점이 살짝 녹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큰 부상은 아니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다시 보니 이미 몇몇 사람들이 그곳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자리가 반들반들하게 광이 나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뒤늦게 헛웃음이 났다.


요쿨살론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드디어 다이아몬드비치에 갔다. 

차를 운전해 주는 가이드가 가방에서 곡괭이를 챙기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는데, 그의 곡괭이를 보자마자 한 친구가 “빙하 위스키야!” 하고 속삭였고 그 말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내 심박수도 순간적으로 크게 치솟았다.


아무튼 해변에 빙하가 널려 있는 모습은 신기했다. 빙하가 쌓여 있는 해변으로 가, 사진을 여러 번 찍은 후 바닷가에 널려 있는 빙하 덩어리 중 가장 커다란 것 근처로 가 곡괭이로 빙하를 캤다. 너무 크거나 작지 않게, 그러니까 잔에 들어가기 알맞은 크기로 얼음을 캔 후 잔에 담고 위스키를 넣었다. 연한 갈색빛의 영롱한 색채가 햇볕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뭉텅하게 썰린 얼음조각이란.


우리는 잔을 부딪히고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어쩐지 짭짤한 맛이 느껴지는 듯도 하고, 입안에 달라붙는 것이 기분 탓인지 진짜 맛이 그러한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원한 야외에서 속을 데워주는 도수 높은 술을 마셔서인지 기분도 퍽 좋아졌다. 어쨌든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분위기에 흠뻑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저녁에도 빙하 위스키를 먹으며 지금 이 순간을 다시 곱씹어보자. 

모종의 눈짓을 주고받은 우리는 텀블러에 든 따뜻한 물을 비운 뒤 안에 얼음 몇 조각을 담았다. 뭘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어 하며 아이스팩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텀블러에 넣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기도 했다. 그렇게 넣어간 빙하 조각은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할 즈음에는 투명한 물이 되어 녹아 있었다. 

텀블러 입구가 좁아 커다란 조각을 넣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이전에 따뜻한 물을 넣어두었기에 보온 상태였던 병이라 보냉 역할을 하지 못할 거란 걸 잊은 것이다. 찬물로 한 번 헹군 후 넣을걸. 너무 아쉬웠다.


아쉬움을 달래고 나서도 너무너무 아쉬워서 우리는 그냥 질척여보기로 했다. 언제 또 아이슬란드에 오겠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건 꼭 하자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며칠 뒤, 왔던 길을 다시 돌아오는 길에 다이아몬드 비치에 한번 더 들르게 된다. 오직 빙하 위스키를 한 번 더 맛보기 위해서.

 

첫 번째와 달리 두 번째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플라스틱 잔 대신 간단한 차를 마시기 위해 항상 챙겨 다니던 캠핑용 컵과 텀블러, 그리고 위스키와 거기에 곁들여 먹을 초코과자와 캐러멜 등등. 왜냐하면 이번 경험은 우리의 여행에서 진짜로 마지막이 될 테니까.

 

다시 해변에 도착한 우리는 위스키를 한 잔씩 더 마시고 각자 가져온 빈 텀블러에 빙하 조각을 조금씩 담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식사에 또 한 번 빙하 위스키를 곁들여 마셨다. 얼음은 천천히 녹고 가져온 술들이 모두 다 동날 때까지.



다이아몬드 비치

바트나요쿨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빙하들이 이 검은모래해변에 떠내려와 있다. 크고 작은 빙하 조각(!)은 검은모래의 흑색과 대비되고 눈부신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데 그게 마치 다이아몬드를 닮았다. 늘 이렇게 빙하들이 있는 건 아니고-너무 따뜻하면 녹아버리니까-, 적당한 온도일 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조금 따뜻한 편이었던 것 같다. 


요쿨살론

‘빙하호수’라는 뜻으로 바트나요쿨의 빙하들은 이곳을 거쳐 다이아몬드비치로 떠내려온다. 이곳의 빙하들은 떠다니는 것이라고 하지만 마치 정박해 있는 듯 보인다.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할 것. 안전지향주의인 나도 한번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나저나 빙하는 파랗고 또 옥색에 가깝구나, 캔디바 같다, 그런 생각을 한참 했던 풍경. 


이전 09화 절벽 앞에서 쏟아져 내리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