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에서 보름 정도 살아보고 싶어

한 달은 긴 것 같아, 여행 가서 2주 정도 지나면 집에 가고 싶더라고

by 이느긋

여행을 갈 때면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마을이 생긴다. 처음 그런 생각을 했던 건 태국의 수상 마을에 갔을 때였다. 당일투어였던 그곳은 낮에는 암파와 수상시장을 구경하고 저녁이 되면 배를 타고 이동하며 반딧불이를 보는 구성이었다.

수상시장에서는 파리가 윙윙 날리는 곳에서 손을 훼훼 저어가며 짠맛 나는 새우구이를 먹었다. 파리가 이렇게 많이 앉았는데 괜찮을까 생각하면서도 바삭하게 잘 구워진 새우구이는 맛있었고, 맥주를 마시며 알코올이 들어갔으니 희석해 줄 거야 하며 안심하는 낙관이 있었다. 든든해진 뱃속과 알딸딸하게 도는 알코올의 기운을 이기며 땡모반을 들고 시장을 거닐었다.


밤이 어두워지자 강을 중심으로 시장 너머에 있는 집들에서 하나둘 불빛이 밝아왔다. 리조트 같은 숙박시설이었을 수도 있지만 왠지 내 눈에는 민가 같은 느낌이었다. 집 앞에는 작게나마 부두가 있었고 조그만 나룻배가 정박해 있었다. 다들 그 배를 통해 시장이나 집 혹은 펍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날은 차츰 어두워지고 있었다. 빛에 적응한 눈이 이제는 어둠에 적응하면서 아득해지는 시야 속에서 마을은 점차 고요해져 갔다. 반딧불이를 보기 위한 객인 우리가 배에 오르자 배는 엔진 소리를 내며 강 안쪽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곳에서 정신없이 밤의 숲으로 들어가면서 눈에 불을 켜고 반딧불이를 애써 보기 위해 노력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서 며칠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품었었다.

이 숙소에서 저곳 시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이용해야겠지. 더위에 영향을 덜 받는 팔랑팔랑한 옷을 입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 것도 참 좋겠다 싶었다. 배를 타고 저쪽 부두로 넘어가면서 저쪽 부두에서 다가오는 모르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드는 상상도 잠시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계절의 정반대편인 아이슬란드의 겨울에 있다.


강물이 아니라 눈밭이 펼쳐져 있고, 각 집과 집 사이가 아주 먼 곳. 손을 흔들면 보이지 않으니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는 빨간색 지붕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수밖에 없는 그런 곳.

우리의 여행 경로는 아이슬란드 남부지방을 쭉 달려서 어느 지점을 경계로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낮에는 그 경로 사이에 포진한 관광지들을 보고 밤이면 오로라를 기다리는 반복이었다. 매일같이 새로운 숙소로 옮겨야 해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바로 짐을 싸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은 뒤 다음 숙소에 도착해 다시 짐을 풀어야 했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한참을 운전해 가야 하는 여행의 특성상 이미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리에겐 다음 여정이 이만큼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정 속에서 나는 짐을 쌀 때마다 잃어버리지 않는 연습을 해야 했다. 어렸을 적부터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덜렁대는 탓에, 뭔갈 잃어버리고 나면 파도처럼 밀려드는 후회와 죄책감을 견디기 싫어 이런 성격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지금은 물건을 그다지(절대는 없으니까) 안 잃어버리는 사람이 됐다. 그러나 어릴 적 실내화나 우산이나 이런저런 것들을 잃어버린 기억은 지금도 가끔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머물렀던 자리에 두고 온 건 없을까? 하고.


아 맞다! 외치며 뒤적거려 보면 내가 분명 잃어버렸을 거라 생각한 물건이 습관처럼 두는 자리에 잘 놓여 있다. 그러나 가끔씩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앉는다. 이번 여행에서도 분명 비슷하게 심장 내려앉는 경험들이 있었다. 가끔 습관적으로 캐리어를 뒤적거리며 짐을 확인하고 늘어진 것들을 집어넣는 나를 친구들은 종종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 해도 습관적으로 자꾸만 물건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집어넣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캬비크에서 남부지역을 따라 동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하던 우리는 어느덧 분기점을 맞이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일정에서 가장 동쪽으로 와, 이곳에서부터는 다시 레이캬비크로 돌아가는 경로로 다시 아이슬란드를 돌아볼 예정이었다. 동부지역으로 갈수록 인적은 드물었고 운전 도중에 길에 방목된 말이나 사슴을 만나기도 했다. 인적이 드문 만큼 풍경은 더욱 명징해져서 자꾸만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바로 전날 머무른 숙소가 샤워시설이 좋지 않은 높은 산속 산장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 숙소는 어떤 곳일까 내심 궁금해졌다. 산장에 있으면 오로라를 보기에 좋았고, 목장을 겸하는 펜션이면 시설이 좋았는데 앞으로 일정이 얼마 남지 않은 터라 편안한 곳에서 시간을 잘 보내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평탄한 길을 쭉 달려가던 차는 이윽고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마트에 들르기 위한 걸까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작은 집들이 종종 구획에 따라 늘어선 곳의 어딘가에 차가 멈춰 섰다. 우리는 내심 탄성을 질렀다.


"여기가 오늘 숙소야?"

"너무 좋다!"

"집도 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까지 머무른 숙소들 가운데 '마을' 안에 있는 곳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친구들이 숙소 안에서 보내느라 하루를 쓴 그곳도 목장 펜션이었기 때문에 주위에 다른 집들은 없었는데, 이곳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게다가 집도 커다란 2층집이었다.


우리는 숙소 안으로 들어가 집안을 살펴보았다. 다섯 명인 우리가 각자 방 하나씩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방이 많았고 화장실도 두 개나 되었다. 주방도 커다랗고 거실도 넓고 티브이도 있었다. 와 너무 좋다! 우리는 연신 감탄하며 숙소를 살폈다.


각자 머무를 방을 하나씩 골랐는데, 나는 2층 다락방을 골랐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야 해서 다들 크게 내켜하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나로서는 한 번만 잘 들고 올라가면 혼자만 고요하게 방을 쓸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이 더 눈에 띄었다. 게다가 침대가 세 개나 있는 방인데 혼자서 쓰다니 단점보다 장점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는 장을 봐 온 음식과 가져온 음식들을 모두 거덜낼 요량으로 마지막 만찬을 잘 차려 먹었다.


이제 여행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밤이 깊어져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교환하고, 남은 위스키를 비우고, 텀블러에 녹아 있는 빙하 물을 컵에 따라보기도 하며 여행 일정을 하나하나 복기했다. 어디가 좋았고 어디는 더 좋았고 그래서 행복했고 같은 대화를 나누다가 아쉬운 가운데 시간이 지나가고 아쉬움보다 피곤함이 더 우세가 됐을 때쯤 각자 방으로 들어가 하루를 정리했다.


다음날 아침 2층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떴다. 숙소에 도착한 간밤에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아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낮이 되자 마을의 풍경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이웃집은 가까웠고 차량이 다니기 좋도록 길이 뻗어 있었고 주차된 차들도 보였으며 멀리 설산도 보였다.


문득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어떤 일주일을 보내는지, 그리하여 어떤 일상이 완성되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다음 여행지로 떠나야 하는 여행자로서는 못내 궁금한 마음만을 가득 품은 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마지막으로 짐을 점검하고 쓰레기를 분리하고 거실의 방명록에 적혀 있는 여러 외국어들과 한글 가운데 우리의 방명록을 작성한 뒤 캐리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에 아이슬란드에 온다면 이 지역 이 숙소에 머물고 싶어. 한 2주 정도만 일상처럼 살아보고 싶다."


아쉬운 마음에 중얼거리자 다른 친구들도 일주일 살기 혹은 한 달 살기 등 이곳에 며칠 더 묵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그동안의 여행 일정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숙소였고 마음에 드는 마을이었다.

아마 마을이 모여 있어 있을 수밖에 없는 여러 조명들 탓에 오로라가 자주 보이진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을 잘 챙겨서 트렁크에 짐을 실었으나, 여기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만은 잊어버린 듯이 남겨두고 떠났다.


이제 우리는 이 여행에서 아니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 그 너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건 바로 이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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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스네스

키르큐펠과 더불어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토스폿이다. 너머로 너무 멋진 산이 있고, 검은모래해변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면을 남길 수 있다. 해변으로 조금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 물이 반사돼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또) 얼어 있어서 수월하게 영롱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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