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사슴탐사
1.
3월 초엔 따뜻한 나라로 갔다. 누군가 '요즘 뭐해? 어디에 있어?'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장했다. '나는 지금 따뜻한 나라에 있어.' 그러곤 내심 그 대답에 만족스러워했다. 태국이라는 나라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나라라고 뭉뚱그리면서 나를 감싸고 있는 뜨거운 햇볕과 더운 바람과 바다 냄새를 느꼈다. 나는 저기에 겨울을 두고서 이곳 여름을 방문하고 싶었다. 나는 저기 겨울에 내가 가진 온갖 춥고 쓸쓸한 것들을 버려두고 애써 잊은 채, 이곳의 여름에 빠져 있었다. 두고 온 것들은 찬 바람을 견디며 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코사무이라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섬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태국은 방콕만 몇 번 가보았고 다른 지역에 간다고 상상했을 때 떠오르는 지명은 치앙마이나 푸껫, 끄라비 정도였다. 이름도 낯선 코사무이 섬에 가기로 결정을 한 뒤,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보니 신혼여행으로 많이 찾는 휴양지라고 했다. 직항은 없고 방콕을 경유해 가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코사무이 섬 가까이에 있는 코팡안 섬에서 풀문파티가 열린다고 했다. 또한 그곳은, 동양의 이비자로 불리며 불야성이 이어진다고 했다. 나는 잔잔하고 싶기도 했고 소란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 요소가 곳곳에 있어서 좋았다. 원래는 '치앙마이에 오래 머물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여행이었는데, 코사무이의 비중도 제법 커졌다. 코사무이에서 치앙마이 그리고 다시 방콕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계획하며 그렇게 조금씩 따끈따끈 해진 것도 같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섯 시간, 방콕에 도착해 다시 국내선을 타고 한 시간가량. 코사무이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조금씩 어둑해져가고 있었다. 그래도 햇빛이 있을 때 호텔에 도착할 수 있겠어, 하고 생각했는데. 캐리어를 기다리는 데 시간을 보내고, 호텔로 가는 차량을 기다리는 데 시간을 보내고 나니 늦은 밤이었다. 짐을 풀고 객실에 씻고 누워 미뤄둔 잠을 잤다. 어느 나라의 어떤 호텔인지 내가 있는 곳이 확실히 실감되지 않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휴양지의 풍경이 피부로 느껴졌다. 사락이는 파도 소리에 눈을 뜨고 발코니로 나가 밖을 내다보면 햇살을 품은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사람들의 잔잔한 소란이 들려오는 휴양지의 아침. 바깥에는 열대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우뚝 서 있었다.
2.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일을 하는 동안 틈을 내 휴가를 떠나왔기 때문에 휴식 자체에 집중했던 것 같다. 오늘 무얼 하고 보낼지, 어떤 액티비티를 즐기고 어떤 관광지에 가고 어떤 카페에 갈지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일찍 일어나 아주 늦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치 일하듯 수행해간 여행이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떠나온 여행지에서 나는 아주 느긋해지고, 그러자니 반대로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는 곳 도처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당연한 걸 전에는 왜 깨닫지 못했지 싶을 정도로.
공항에는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호텔에는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액티비티를 즐길 때는 그곳을 안내해주거나 그곳으로 가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가 창궐했을 때 누군가 이런 이야길 한 적이 있다. 온 세상이 2주 정도만 멈추어 있으면 어떨까? 그렇다면 전염병인 코로나도 사그라들지 않을까? 그럴듯한 제안에 수긍하면서도 동시에 생활의 필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택배는? 그렇다면 식재료는? 그렇다면 물이나 전기는 어떻게 공급되지?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당장 아픈 사람들은 누가 치료하나?
우리는 각자의 일을 하면서 세상과 얼마나 관여되는 걸까. 여행지에서 또한 그랬다. 가끔은 너무 편안해서 사람의 존재를 잊는다. 당연히 주어진 것처럼 여겨진다. 누군가 만들어준 커피라는 것을 잊은 채 그냥 커피를 마신다. 누군가 정리해 준 공간이라는 것을 잊은 채 몸을 뉜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터라는 것을 잊은 채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사람에 집중해서 생각하고 나니 관점이 달라졌다. 잠시 앉았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그 나라 언어로 확실하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연습을 했다. 나의 편리를 위해 닿았던 손길을 생각하기로 했다. "코쿤카. 땡큐카." 그 말은 파동이 되어 번지고 번져서, 과거의 나-마찬가지로 일하고 있던-에게도 다정하게 가닿을 것이다. 아마도.
3.
자고 싶을 때 잠들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식사를 챙겨 먹고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편한 옷을 입고 슬리퍼 하나를 신고서 털레털레 걸어가는 일. 그걸 질리도록 해보고 싶었다. 생각을 하지 않거나, 불현듯 솟아난 생각들은 다른 나라의 바닥에 조금씩 버려가면서 비워내고 싶었다. 비워낸 자리는 채우거나 혹은 채우지 않아도 괜찮았다. 코사무이에서도 치앙마이에서도 방콕에서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주 웃고 크게 웃고 이상하게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보니 마지막에는 하루만 더, 와 이제는 그만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차차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
3월의 사슴탐사를 갈무리하는 데 참 오래 걸렸다. 그러느라 4월의 절반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