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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느긋 May 02. 2023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물의 결

4월의 사슴탐사

1.

사람을 만나고 싶은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밀물과 썰물처럼 반복된다. 3월에는 그렇지 않았고, 4월부터는 좀 그리웠다. 마음이 변덕을 부릴 때는 그냥 제멋대로인 채로 휩쓸리기로 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오랜만이에요로 시작되는 메시지를 많이 보냈다. 안심이 되는 것은, 상대방이 이런 연락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아마도). 그렇게 잠시간 만나서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셨다. 서로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과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나누는 편안한 이야기에 안정감을 느낀다. 사람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오면 이상하게도,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책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읽는 책은 늘 그렇듯 에세이다. 안 본 사이에,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신간을 냈고 새롭게 눈에 띄는 책들도 있었다. 나는 에세이에 담겨 있는 크지 않은 이야기들이 좋다. 일상적인 이야기들은 작을수록 섬세하고 가까이에서 나는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고, 그런 일로 이런 생각을 했고, 또 이러면 어떨까 생각했다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그들의 옆집 창문 하나를 담당하게 된다. 밤 산책을 하다 만나는 불 켜진 창문 그리고 불 꺼진 창문들.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곧잘 궁금해지는데, 에세이는 그 창을 열어 스스럼없이 나를 초대해 주는 것이다. 치열하면 치열한 대로, 느리면 느린 대로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 자신의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2.

얼마 전 작업실에 찾아온 손님이 진한 분홍색 작약 다발을 선물로 가져왔다. 내가 작약을 좋아하잖아, 마침 꽃집에 있더라고 하면서. 꽃을 화병에 꽂는 걸 보면서, 벌써 작약철이 되었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사진을 찍고 SNS에 업로드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5월의 작약’이라고 썼다. 그렇게 업로드까지 하고서 뒤늦게 아차 아직 4월이지 했다. 그러나 4월이라기엔 바깥은 너무나도 5월의 풍경이 아닌가? 연두색 새순도 벌써 짙어지고 있다. 그러나 녹음이라는 단어를 4월에 사용했던가? 그건 6월에나 떠오르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계절은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예열 시간은 짧아지고 빠르게 끓어오른다.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차가운 날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곧 5월이고 화병의 작약은 5월까지 함께할 것이므로, 5월의 작약이라고 해도 되겠지. 짙은 분홍색이었던 작약은 하루하루 만날 때마다 색깔이 옅게 빠지기 시작해서, 이윽고 분홍에서 연분홍으로 변해갔고, 지금은 흰색이다. 곱게 다물려 있던 꽃망울도 그 시간에 기대어 활짝 펴졌다. 그 과정을 보다가 나중에 작약이 그렇게 살다 간 자리에 다음에는 수국을 꽂아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3.

Ins kalte wasser gesprungen’는 영어로 ‘Jump in the cold water’, 찬물에 뛰어들다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새로운 경험을 시도할까요? 여러분은 어떠한 위험이든 감수하고 끝까지 부딪혀볼 용기가 있나요? 위험성, 결과, 평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머릿속 계산을 멈추고 열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뛰어들 수 있을까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자는 샴페인을 마시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그냥 한번 뛰어들어 볼까요? 서로를 지지하는 동료들과 함께라면, 도전하는 인생과 그 여정이 더욱더 즐거워질 수 있습니다. _<나탈리 카르푸셴코: 모든 아름다움의 발견> 전시 중에서



4. 

4월 한 달은 수영을 하며 보냈다. 내가 수영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달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정확히 한 달 전 나는 수영복을 입는 것도 수모를 쓰는 것도 수경을 쓰는 것도 참 어색했었는데. 고개를 물에 밀어 넣는 순간 크게 밀려오는 공포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는데. 익숙해지고 나면 처음의 감각은 쉽게 잊히기 마련이라 지금 이 경험들이 매우 귀하다. 숨이 편안해지면 그때를 자주 돌이켜본다. 물속에 얼굴을 넣고 코로 숨을 내뱉던 순간, 고개를 들고 입으로 숨을 밀어넣던 순간. 숨을 파 뱉고 합 들이켜며 맡았던 염소 냄새, 분명 가까이 있었는데 어느새 레일의 끝에 도착해 있던 앞 사람, 자주 막히던 숨과 자주 넘어오던 물. 쉴새없이 켁켁거리던 감각들을. 


운동을 할 때마다 어플에 기록한 것을 최근 살펴보니 킥판의 비중이 조금씩 줄어들고 자유형의 비중이 조금씩 늘어나 있었다. 심박수 기록을 보면, 심장이 터질 듯한 건 여전하다. 몸에 힘을 빼는 법은 아직도 여전히 모르겠다. 자유형을 할 때 오른쪽보다 왼쪽으로 호흡하는 편이 좀 더 낫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았다. 지난 한 달간 오른쪽이 더 편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잘하든 못하든 오른쪽과 왼쪽을 모두 사용하며 익히는 건 왼손잡이의 어쩔 수 없는 숙명 같다. 


수영 강습을 처음 들었던 날 50분 동안 내가 나아간 거리는 킥판음파발차기 225미터, 9랩이었다. 이 거리도 조금씩 늘고 또 (내 생각에) 안정되어가고 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더 멀리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팔을 앞으로 뻗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물속에 팔을 밀어 넣고 물을 쓸면 내 손가락 사이로 물결이 지나가고 허벅지에 손끝이 닿았다가 다시 물을 타고 밖으로 나간다. 우리는 물에서 나아갈 때 물살을 가른다거나 물살을 헤친다는 표현을 주로 쓰지만 수영을 하고 있으면 물은 밀어내는 것도 아니고 뒤에 두고 가는 것도 아니라 그저 순환 같다. 이 순환으로 내 몸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신기하다. 수영은 내가 깊은 두려움과 벅찬 즐거움 사이를 줄타기 하며 이어가는 몇 안 되는 운동이다. 배우는 과정과 정체되는 과정과 비로소 뛰어넘는 과정을 모두 겪으면서 계속해서 오래 좋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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