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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느긋 Jun 06. 2023

5월의 색깔은 Cyan&Yellow

초록은 노랑과 파랑의 컬래버레이션

0.

5월이 어땠더라?

5월의 마지막날에 있었던 일 때문에 모든 걸 잊어버린 것 같다.



1. 노랑

낮 시간, 햇살이 가득한 거리를 산책할 수 있는 행복을 소중히 생각하기로 한다. 머리 위로 노랑이 쏟아지고 발아래로는 노랑 카펫이 깔린 길을 걷는다. 참으로 한적한 한낮이다. 우리나라의 계절을 4개로 나누면 12월부터 2월까지는 겨울, 3월부터 5월까지는 봄, 6월부터 8월까지는 여름, 9월부터 11월은 가을이라고 하던데 올해는 어쩐지 5월부터 여름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벚꽃이 예년보다 빨리 피었고 모든 계절이 한 템포 빨리 온다고 느끼면서도 이 변화가 신기하고 또 섬뜩하다. 얼마나 변화하려고 그러나, 얼마나 더워지려고 그러나 이 엇박자는 어떤 징조일까 하면서.


그나마 5월이 5월임을 보여주는 건, 길에 핀 장미였다. 흔히 5월의 장미라고들 하니까. 5월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덥다 하다가도 길에 핀 장미들을 보면 5월이구나 안도하게 되는 나날들이었다. 지난해 엄마와 대화를 나누다가 24절기가 윤달을 제외하면 양력 날짜를 기준으로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게 되어서 주변에 이야기를 해주며 놀라워했다. 24절기 자체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나눈 것이라 그렇다는 것. 그동안은 별생각 없이 올해는 2월 4일이 입춘이네, 했는데 사실 작년에도 똑같이 올해는 2월 4일이 입춘이네 했던 것이다. 그 후로 궁금해져서 여러 절기들을 찾아보며, 농사일이나 날씨의 변화 같은 살아가는 일과 관련된 것은 양력 날짜를 기준으로 하고, 정월대보름이나 설날, 칠석처럼 그 뜻이 날씨의 직접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세시풍속과 관련된 것이면 음력으로 센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매년 어떤 절기가 될 때마다 그 한자어의 설명에 부합하게 거짓말처럼 해와 바람이 바뀌어 있는 걸 느끼며 신기했던 기억.


5월에는 하지와 소만이 있었다. 여름이 들어오고 이윽고 햇볕이 가득 차는 달이 5월인 것이다. 낮에 머리 위로 쏟아지는 노랑을 맞으면서, 발아래로 짙어진 노랑 카펫 위를 걸었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닌 걸지도.



2. 파랑

이 달에는 자유형을 익히면서 동시에 배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유형을 할 때는 앞으로 나아가는 활동성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배영을 하면서는 내 몸이 마치 나룻배 같다는 점을 발견했다. 발을 노 모양으로 만들어서 참방참방 물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천장의 타일을 가만히 바라본다. 천장의 타일이 내 눈에 올곧은 모양으로 보이고 있으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어쩐지 시야가 삐뚤어지는 것 같으면 궤도를 이탈한 것이다. 궤도를 이탈하면 다른 트랙의 사람과 필연적으로 부딪치게 된다. 실제로 그렇게 궤도를 이탈해 온 사람과 자유형을 하던 내가 부딪친 경험도 있었다. 그 사람은 나와 부딪친 것도 모르고 궤도를 이탈한 채로 나아가다가, 내 뒤에 평영을 하며 오던 사람과 한번 더 부딪칠 뻔하여 교통정리를 해준 적이 있다.

 

그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나의 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똑바른 방향 혹은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호흡을 이어나가며 헤엄치는 자유형과 달리 배영은 왠지 도인의 자세를 연마하는 것 같다. 떠서 나아가다보면 조금씩 생각이 사라지고 가만해진다. 물에 떠 있다고 호흡을 게을리하면 몸이 가라앉으면서 코로 물이 들어온다. 그러므로 코로 내쉬고 입으로 들이마시는 호흡을 이어나가면서 천장의 타일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발은 그대로 참방참방 리듬에 맞춰 물을 떠낸다. 물을 떠내야 앞으로 나가는 건 정말 노 젓는 것을 닮았다. 물론 속력을 내서 빨리 가는 건 또 다른 스킬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둥둥 떠가는 것이 재밌다.


반대로 자유형은 고전 중이다. 될 듯 되지 않는 것이 아쉽고 조급하여 무리하게 했더니 목과 어깨에 끝내 담이 왔다. 평소의 가벼운 담과 달리, 이 통증은 좀처럼 사라질 줄 모르고 더욱 아파오기만 했다. 목어깨에 담이 와서 불편한 기분이 삶의 질을 이렇게까지 저해할 줄은 몰랐다.


컴퓨터 앞에 앉아 문서작업을 하기도 힘들었고 실제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의 이 증상은 PT선생님의 스트레칭과 한의원의 물리치료 등을 통해 일주일 정도 후에 호전되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 통증에 허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손상을 입은 몸은 다음번 손상에 대해 지레 겁먹고 있었고 수영장에서 스타트 준비를 하면서 목어깨가 더욱 긴장한 것을 느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조금씩 살살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해나갈 뿐이다. 몸이 적응을 하고, 긴장을 풀고, 다시 물에 몸을 풀어놓을 때까지. 겁먹었지만 너무 겁먹지는 말자 다짐하면서.


다시금 물이 두려워질 때마다 내심 생각한다. 두 달 전에는 물에 뜨는 것도 못했다는 것을. 한 달 전에는 자유형으로 한 레일 가는 것도 못했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한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두려울 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하던 것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제의 나보다 조금은 더 나아가 있겠지.



3. 초록

5월이 끝나기 전, 제천에 갔다. 충청도에 가면 동해나 서해나 남해와 달리 멋진 산과 숲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간혹 커다란 호수도. 이런 첩첩산중은 가면 갈수록 우리나라의 한가운데로 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데, 바다로 향하는 길이 일종의 출구라서 그곳까지 다다르는 것이 관통하는 듯한 체험이라면 이렇게 한가운데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출구 없는 미로로 자꾸만 헤매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따라서 제천에 도착했을 때도 종착했다는 감각보다는 분기점에 선 감각이 앞섰다.


제천의 리조트에서 나그네처럼 머물며 여유를 부렸다. 숲길을 걷고 수영장을 탐색하고 저녁식사 거리를 주문 후 기다리는 동안 오락실에서 용돈 만 원을 부여받고 하고 싶은 놀이들을 즐겼다. 총을 들고 달려드는 좀비의 머리를 쏘고 우주로 향하는 길목에서 상대편 로봇을 무찔렀으며 피치공주가 되어 마리오 형제들과 질주를 했다. 펌프를 하며 주춤주춤 리듬을 익혔고 농구 골대에 공을 집어넣으려 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고 수중의 만 원은 사라져 있었다. 실은 반대가 맞다. 수중의 만 원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던 것이다.


예약해 둔 저녁식사를 가지고 장을 보고 다시 숲길을 지나 숙소로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산 한가운데에 모기를 피해서 앉아 있으니 편안한 고립감이 들었다. 하루 더 있었으면 좋았다 싶게 아쉬운 일정이었지만 온통 초록인 곳에서 만끽하고 그래서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분기점을 돌아 다시 집으로.



4.

인쇄물에서는 CMYK 네 가지 컬러로 색상을 만든다. 우리 눈에 보이는 빛깔을 종이 위에 인쇄되는 색상과 똑같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파랑과 노랑을 보면서 두 색깔을 겹치면 나오는 색깔인 초록에 대해서 생각했다. 5월이 신록의 계절일 수 있는 이유는 나무에서 땅에서 겨우내 움츠렸던 새잎이 돋아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파란 하늘 바람과 노란 햇살이 그 뿌리 끝에 꾸준하게 색깔을 넣어준 덕이기도 하다.


하루가 오고 또 하루가 가는 일상의 변화 속에서도 꾸준히 해는 뜨고 바람은 분다. 그 색채들을 머금고 돋아난 순한 초록을 한 달 내내 열심히 눈에 담았다. 6월은 이 초록이 더 아름다운 달일 테다.


한 달 한 달 시간이 지날 때마다 사실 마음은 조금씩 조급해지고 내가 서 있는 지점을 가늠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이 계절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는 것 또한 내가 만든 행운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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