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사슴탐사
1.
삶에는 좋은 일도 있고 안 좋은 일도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런 사건들에 흔들리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어서, 언젠가 새해 다짐을 '연연하지 않기'라고 정한 적이 있었다. 그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다짐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나에게 2월은 연연하지 않기 위해서 자꾸만 나를 환기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2.
어렸을 때 나는 뭔가를 잘 잃어버리는 아이였다. 비가 올까 봐 우산을 들고 간 날에는 우산을 두고 돌아왔고, 실내화 가방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었으며 손에 쥔 것은 반드시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 엄마는 나의 이런 꼼꼼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 많이 걱정했다. 그 걱정 때문이었을까. 성인이 된 나는 반대로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주위에 누군가 뭔가 잃어버렸다고 하면, "그걸 왜?" 하고 되묻곤 했다. 이런 간단한 질문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 상실이 이해조차 되지 않는다. 무언가를 잃어버린다니, 어째서. 간직하고만 있으면 될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에 뭔가 잘 잃어버리던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지금은 그 반작용으로 확인 강박이 좀 있다. 그걸 어디에 두었더라, 내가 그걸 했던가. 행동을 역순으로 생각을 되짚으면서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제대로 일을 마무리했다는 것을. 까먹고 내버려 둔 일은 없다는 것도. 그럼에도 계속해서 확인하고 애써 또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조금 믿어보기로 했다. 믿는 데도 다짐이 필요했다. 그걸 잃어버리진 않았을까. 가슴 한구석이 선뜩해지면, 아니야 괜찮을 거야 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그리고 나중에 확인하면 역시 생각대로 모든 것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무언가를 잘 잃어버린 아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자랐다.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었냐면, 무언가를 잘 안 잃어버리는 나 자신에 몰두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데에 한눈을 팔았다. 그리고 얼마 전 밤에 홍대입구역에서 합정역까지 직선으로 된 길을 걸으며, 머릿속에 돌아다니는 생각을 하나하나 발치에 두고 걷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렇게 뚜벅뚜벅 걷는 것처럼, 내가 한 걸음 나아가면 내 뒤론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 그렇게 두고 가자고. 떨어진 것은 떨어진 대로, 그렇게 남은 흔적은 흔적 대로 두고 오자,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간이었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3.
언젠가부터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국내의 소도시에 가는 게 좋아졌다. 얼마 전에는 작업실 친구들의 일정에 끼어서, 예산과 공주를 지나 대전을 다녀왔다. 대전은 가본 적 있는 도시고 다른 두 도시는 처음이다. 그곳을 이미 아는 사람이 알려주는 그 도시의 풍경과 맛있는 음식집과 도시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잔잔하게 소란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간단히 말해서, 맛있는 것 많이 먹고 또 많이 웃고 새로운 것을 많이 보면서 보냈다. 그래 난 이런 거 참 좋아했었지 하는 자각. 이런 기분을 촘촘히 느껴야겠다고 다짐한다.
공주에서는 마곡사에 갔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라고 하는데 평일이고 날씨가 흐리다 보니 제법 한산했다. 들어가는 입구에 '해탈문'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였다. 안내판에는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에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라고 적혀 있었다. 나 역시 번뇌하는 중생이었기 때문에 해탈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 문을 지났다. 그리고 문을 나선 후에는, 한켠에 무수하게 쌓여 있는 돌탑들,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보면서 해탈이란 쉽지 않구나 다시금 느꼈다. 나 역시 해탈이 쉽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의 바람 위에, 무너지지 않을 정도의 안전하고 작은 돌을 쌓고 기와불사를 했다. 돌을 올리고 기와에 글씨를 쓰면서는 조금 늦게 알게 되었다. 이건 그냥, 바라는 마음이라기보다는 비우는 행위라는 걸. 남이 쌓아 놓은 돌 위에 새로운 돌을 얹으며 마음을 비우고, 기왓장에 글씨를 쓰면서 꽁꽁 굴려서 딱딱해진 마음을 뱉어낸다. 여기서 나가고 나면 살아가는 것 자체만으로도 더께가 쌓이게 될 것이므로. 그러니까 여기서 비우고 간다. 그뿐이다.
4.
바쁜 2월이었다,라고 쓰고 나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서늘해진다. 서늘해지는 이유는, 소비만 했고 생산은 하지 않았다는 반성과 여전히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히 나는 2월을 바삐 보냈으므로 바쁜 2월이었다, 라고 생각을 마무리해 본다. 다가오는 3월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한 달을 보낸 것 같아.
3월에는 따뜻한 나라로 가볼 작정이다. 그래, 다음 달엔 덜 춥자. 따뜻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