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여행자의 시작점

내 여행의 전환점

by 비주류여행자

인도 여행 한 달째 되던 날, 나는 바라나시에 있었다. 모든 인도 여행자가 한 번쯤 꿈꾸는 도시, 갠지스가 흐르는 그곳에서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남들의 시선을 덜 의식하고, 일정표의 칸을 채우기보다 내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걸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골목, 이름 없는 찻집, 낯선 동네의 저녁빛 같은 것들. 그런 순간들이 나를 붙잡았고, 나는 서서히 ‘비주류여행자’가 되어갔다.


IMG_9735.JPG 바라나시의 어느 골목에서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


20150202_165417.jpg 여행자들이 가지 않는 바라나시 시내에 가면 갠지스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래 계획은 단순했다. 바라나시 이후엔 아그라에서 타지마할을 보고, 라자스탄을 한 바퀴 돈 뒤 다람살라를 들러 델리로 돌아가는 코스. 당시 국민코스라 불리며 많은 여행자들이 따르던 루트였다. 그런데 바라나시에서부터 내 마음이 자꾸 옆길로 기울었다. ‘남들과 똑같은 인도 여행을 할 필요는 없잖아?’ 그 질문 하나가 내 여행의 지도에 작고 선명한 균열을 냈다.


그래서 나는 다음 행선지로 아그라 대신 아요디아(Ayodhya)를 택했다. 이름만으로도 힌두교도들의 심장을 뛰게 한다는 도시. 『라마야나(Ramayana)』 속 라마(Rama)의 탄생지로 전해지고,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의 숨결이 남아 있다는 곳. 동시에 오랜 갈등과 상처가 겹겹이 쌓여 있는, 조용하지만 무거운 도시. 신성함과 비극이 한 곳에 공존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더 끌어당겼다. 여행이란, 아름다운 것만 보러 가는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인도에서 배우고 있었으니까.


SV407007.JPG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의 탄생지인 아요디아의 쌍어문


당시에 아요디아에 간다고 하니 인도인들은 “위험하다”며 말렸고, 한국 여행자들은 “거기가 어디냐”라고 되묻는 사람도 많았다. 인도를 여행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아요디아는 늘 ‘관광지의 목록’ 바깥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그곳이 한국의 오래된 전설과도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왔다는 ‘아유타국’—그 이름과 아요디아의 발음이 마음속에서 자꾸 겹쳐졌다.


여행을 준비하며 읽었던 책들 중, 고고학자 김병모 교수의 『김수로왕비의 혼인길』은 내 상상력을 오래 붙잡았다. ‘역사적 사실’이 확정되지 않은 자리일수록, 여행자는 더 오래 망설이고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 나는 확신을 갖고 떠난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서 길을 택했다. “어쩌면”이라는 단어 하나가 여행의 이유가 되는 순간이 있다. 내게 아요디아는 바로 그런 도시였다.


지금은 바라나시에서 아요디아까지 기차로 4시간이면 닿지만, 2005년의 인도에서 이동시간은 거리로 가늠할 수 없었다. 기차 연착은 당연했고, 도착 예정 시간은 그냥 종이에 적힌 숫자에 불과했다. 오후 2시에 올라탄 기차는 한참을 끌며 달리다 밤 10시가 넘어 아요디아에 도착했다. 역 근처의 작은 숙소에 짐을 풀고 누웠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외국인은 물론이고 동양인을 보기 드문 도시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낯설었고, 그 낯섦은 한동안 피부처럼 남았다. 여행의 밤은 늘 그런 식으로, 조금 예민하고 조금 고독하다.


SV406954.JPG 2005년 아요디아의 결혼식 행렬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요디아 왕궁을 찾았다. 만약 이곳이 전설 속 아유타국이 맞는다면, 저 건물과 저 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왔을까.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신이 없기에, 마음은 더 멀리 달려갔다. ‘내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돌바닥도 어쩌면…’ 같은 생각이 스치며, 역사와 상상이 겹쳐졌다. 여행은 때때로 이런 방식으로 현실을 살짝 비틀어, 풍경을 더 깊게 만든다.


SV406962.JPG 아직도 남아 있는 아요디아의 오래된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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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아요디아 왕궁의 모습


왕궁을 둘러본 뒤에는 시내를 천천히 걸었다. 성지의 공기는 어디선가 향 냄새처럼 은근히 번졌고, 오래된 사원과 작은 상점들이 이어졌다. 신성함이 스며든 자리마다, 오래된 갈등의 그림자도 조용히 앉아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도시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다만 그저 오래 바라보았다. 이해보다 먼저 와닿는 감정이 있을 때가 있으니까.


한낮, 공원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총을 멘 경찰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내 카메라를 가리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웃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카메라는 사람들 마음속의 작은 축제였다. “사진 한 장”이 곧 “기억 하나”가 되던 시절. 나는 셔터를 눌렀고,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그 웃음은낯설고 조심스러웠던 아요디아의 공기 속에, 아주 얇은 온기를 남겼다.


SV407047.JPG 무섭게 생겼지만 다정했던 인도의 경찰


다음 목적지를 고민하던 나는 다람살라(Dharamsala)로 향하기로 했다. 그 길은 긴 여정이었다. 아요디아에서 기차로 데라둔(Dehradun)까지 16시간, 다시 로컬 버스로 다람살라까지 16시간. 하루를 훌쩍 넘기는 이동이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돌아가냐”라고 물었겠지만, 나는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이 느림과 우회가, 어쩌면 내가 원하는 여행의 모양이라는 걸.


아무도 가지 않는 길. 누구도 계획하지 않는 여정. 그렇게 나는 조금은 느리고, 조금은 돌아가는 길을 택한 비주류여행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요디아는, 내가 그 길 위에서 처음으로 ‘나만의 방향’을 발견했던 도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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