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인도
닐 섬에 머물던 어느 날, 누군가가 400루피를 주고 해먹 하나를 사 왔다. 페브릭 소재로 튼튼하게 만든 해먹이었다. 보기만 해도 편안해 보였고, 직접 누워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건 진짜다!” 어디서 샀냐는 질문이 쏟아지자, 그는 무심히 한마디만 남겼다.
“시장.”
그 한마디에 우리 모두가 움직였다. 영국 친구 폴과 나, 그리고 그지라에 함께 있던 친구들까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전거를 타고 시장으로 몰려가 각자 해먹을 하나씩 장만했다. 그날 이후 해먹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그 해먹은 ‘짐’이 아니라 ‘생활’이 되었고, 여행의 속도를 통째로 바꿔버렸다.
하벨록 섬에 도착한 뒤에는 더 노골적으로 해먹을 달고 다녔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해변의 야자수 사이 그늘이 보이면, 우리는 습관처럼 멈춰 섰다. 그리고 재빨리 야자수 두 그루 사이에 해먹을 걸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이면 방문 앞에 해먹을 설치해 두고 그 위에서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었다. 침대보다 편하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가끔은 밤에 책을 읽다 깜박 졸아 해먹 위에서 잠이 들기도 했다. 그 편안한 잠을 깨운 건 다름 아닌 모기였다. 팔이나 발목 어딘가가 따끔해지는 순간, 현실이 슬쩍 끼어들었다. 모기에 몇 방 물려 잠에서 깨면, 졸린 눈을 비비며 해먹에서 몸을 빼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또 한 번 잠을 청했다.
해먹 위에 누우면 하루가 달라졌다. 무언가를 ‘하고’, 어디를 ‘다녀오는’ 하루가 아니라, 그저 해먹 위에 몸을 맡긴 채 흘려보내도 되는 시간이 되었다. “여행이란 원래 이런 거지.” 혼자 중얼거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풀렸다. 해먹은 느긋함을 새로 가르치기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던 느긋함을 다시 꺼내어 보여주는 신비한 물건 같았다. 오랫동안 잊고 살던 속도를, 야자수 그늘 아래서 조용히 되찾게 하는.
하벨록 섬도 닐 섬처럼 해변에 번호를 붙여 불렀다. 비치 넘버 원, 투, 쓰리… 세븐. 우리가 묵었던 코코넛 그로브 코티지 바로 앞에는 비치 넘버 쓰리가 있었다. 야자수가 길게 늘어진 해변, 눈이 시리도록 에메랄드빛인 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걸린 해먹. 우리는 그 장면 속에 들어가 하루를 느리게 흘려보냈다. 가끔은 그때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여전히 같은 풍경이 남아 있을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비치 넘버 세븐, 일명 엘리펀트 비치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의 석양은 유독 아름다웠다. 닐보다 훨씬 큰 하벨록에서는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다녔다. 비치 넘버 원(One)부터 세븐(Seven)까지, 섬 구석구석을 달리며 우리는 안다만에서의 시간을 만끽했다. 아무런 일정도 없이, 바람이 이끄는 대로. 그러다 마음이 멈추는 곳이 있으면 해먹을 걸고 누웠다. 그날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오늘을 잘 흘려보내기.”
낙원에는 늘 작은 불편이 붙어 다닌다. 안다만에서는 은행을 찾기도 쉽지 않다. 본섬인 포트 블레어에는 은행과 ATM이 꽤 있지만, 하벨록에는 State Bank of India 분점이 딱 하나 있을 뿐이다. 분점이라 영업시간도 짧고 가능한 서비스도 제한적이라, 필요한 일이 있다면 시간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환전은 더 조심해야 한다. 섬 안에서는 환율이 좋지 않으니 가능하면 안다만에 가기 전 인도 본토에서 현금을 넉넉히 준비해 가는 편이 낫다. 물론 그만큼 분실과 도난의 위험도 온전히 내 몫이 된다. 안다만은 편안함과 불편함이 늘 한 봉지에 담겨 오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곳이 아닐까.
하벨록에는 우리가 ‘세븐일레븐’이라고 부르던 마트가 하나 있었다. 물론 진짜 세븐일레븐은 아니고, 그냥 규모가 조금 큰 마트였다. 섬의 특성상 늦게까지 문을 열지는 않았지만 생필품부터 물놀이 도구까지 필요한 건 웬만하면 다 구할 수 있었다. 와인숍도 바로 옆이라 여행자들은 그곳에서 맥주를 사고, 과자를 사고, 또 하루를 어떻게 흘려보낼지 슬쩍 계획을 바꾸곤 했다. 무언가 계획을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계획을 지우기 위해 모이는 곳 같았다.
사실 하벨록은 특별할 게 없는 섬이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바다가 예쁘고, 술이 싸고, 경치가 좋고, 놀기 좋고, 쉬기 좋고…. 그러니까, 여행지에 대해 흔히 말하는 ‘좋은 것들’은 다 갖고 있다. 굳이 하나 더 덧붙이자면 에메랄드빛 바다와 하얀 모래가 만들어내는 대비 정도랄까. 우리는 여행지에 너무 많은 ‘특별함’을 요구하면서, 정작 가장 특별한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는 걸 자주 잊는다. 하벨록은 그 사실을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증명했다. 해먹 하나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우리는 하벨록에서 또 다른 안다만의 시간을 보냈다. 해먹에 누워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던 날들, 바다의 색이 바뀌는 순간을 멍하니 지켜보던 기억들, 스쿠터를 타고 해변을 누비던 바람. 그 모든 조각들이 아직도 내 안에 살아 있다. 때때로 삶이 너무 빠르게 굴러갈 때면 나는 그 해먹을 떠올린다. 400루피짜리 천 조각 하나가 만들어냈던 푸른 낙원.
그리고 그 낙원은 내 마음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 언젠가 다시 오라며 조용히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