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영화를 보다 잠비아가 떠올랐다

프롤로그

by 비주류여행자

영화를 보다가


여러가지 사정으로 요즘은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는데, 몸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빈둥 대다 우연히 한 편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엽문 4: 더 파이널〉


영화는 보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자꾸 잠비아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2011년의 잠비아. 전기가 없어 해가 지면 갑자기 세상이 꺼지는 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자주 듣던 말.


“제발 무술 좀 가르쳐 주세요.”



그들은 동양인을 보면 이소룡을 먼저 떠올렸다


2011년 당시 잠비아에서는 70년대 이소룡 영화가 아직도 ‘현재형’이었다. 아이도 알고 어른도 알고, 술에 취한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영화는 영화일 뿐인데, 순진한 이곳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서 동양인을 보면 “쿵푸!”를 외치고 눈앞에서 무술 포즈를 취해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무척 웃겼고, 또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반복되면 피곤해진다. 그 오해가 어느 순간부터는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너도 이소룡처럼 할 수 있지?”


그 기대를 마주하는 순간, 사람은 묘하게 작아진다. “아니”라고 말하면 내가 그들의 세계를 깨뜨리는 것 같아서. 결국 나는 (그 순간만큼은) 거짓말쟁이가 되기로 했다.



나는야 무술의 고수


한 번은 혼자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 자전거를 잡아 세웠다. 멈춰 서서 돌아보니 건장한 스무 살 남짓의 마을 청년이었다. 그 뒤로는 젊은 청년들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남자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다. 그런데 나를 보는 그들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잠비아 시골에서 나의 발이 되어준 자전거


“제발 무술 좀 가르쳐 주세요!”


나는 무술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릴 때 태권도를 잠깐 배운 게 전부다. 그것도 파란띠에서 그만뒀다. 군대도 해군 기관병 출신이라, 훈련소에서 배운 기초 태권도 동작이 내가 아는 전부였다. 사실 나는 운동보다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쪽에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 그러니까 나는 무술을 ‘가르칠 자격’이 없는 무자격자였다.


그런데 그날, 나는 매정하게 “못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술을 가르치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실망하는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기대가 한순간에 꺼져버리는 장면을 내가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두 줄로 길게 세웠다. 그리고 아주 기본적인 태권도 동작 몇 개를 가르쳤다. 사실 무술이라기보다 군대에서 배운 체조에 가깝고, 태권도 ‘흉내’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그들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지했다.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마치 내가 정말 유능한 무술 사범이라도 된 것처럼.


더운 날씨 탓에 10분쯤 지나자 땀이 났다. 아마도 내 땀은, 분명 식은땀이었을 것이다.


“오늘은 바빠서 여기까지! 다음에 더 알려줄게.”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바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리고 도망치듯 페달을 힘껏 밟았다. 한동안은 그들을 피해 다녔다.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닌 덕분에, 그날의 수업은 잠비아에서 나의 첫 무술 수업이자 마지막 수업이 될 수 있었다.



‘무중구’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이상한 권력


잠비아에서 외국인(대개 유럽인)은 흔히 무중구(muzungu)라고 불렸다. 동양인을 보면 '칭챙총(Ching Chang Chong)'처럼 이상한 발음으로 부르며 비하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만큼은 그런 표현보다는 무중구라는 말을 더 많이 썼다. 내가 유럽인처럼 생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말 안에는 단순한 호칭 이상의 것이 들어 있었다. 낯섦, 호기심, 기대, 그리고 어떤 종류의 권력. 나는 원한 적 없는데, 그 이름이 나를 어떤 자리로 자꾸 밀어 올렸다. 어떤 날은 “무술 고수”였고, 어떤 날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고, 어떤 날은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곳에서 하루하루 내 삶을 살아내기도 벅찬 상태였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그때 생각이 났다. 내가 잠비아에 왜 갔는지, 무엇을 기대했는지, 그리고 그 기대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나는 나름 ‘봉사’를 하러 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들에게 ‘봉사자’가 아니라 어떤 상징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금이 갔다. 그리고 그 금은 결국, 내가 잠비아를 떠나는 결정까지 데려갔다.


2011년, 작은 디지털 카메라 하나만 있어도 그것은 곧 작은 권력이 되었다. 사진을 찍어 달라 조르는 사람들.



그런데도, 가끔은 그때가 그립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잠비아는 내게 애증이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힘들었는데도 그립고, 도망치고 싶었는데 언젠가 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남았다.


전기가 없어 별이 유난히 밝던 밤, 아이들이 나를 구경하러 몰려오던 첫째날 오후, 우물 앞에서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조용해지던 순간, 그리고 “여기서 나는 뭘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붙잡던 시간들…. 내 20대의 마지막은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흘러갔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기록해야지, 기록해야지 생각만 했던 것들을 더 늦기 전에 이제는 글로 남겨보려 한다. 모든 기억을 되살릴 순 없지만, 그곳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다시 보며 조금씩 꺼내 보려고 한다. 앞으로 어떤 연재가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쓰지 않으면, 이 기억들은 더 희미해질 것이다.


잠비아에서의 생활이 언제나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