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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석사를 마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8개월 동안 아프리카 파견 교육을 받으며 모금활동을 했다. 나의 선택지는 잠비아와 모잠비크, 두 나라였다. 모잠비크는 포르투갈어를, 잠비아는 영어를 사용했다. 포르투갈어를 다시 배우기보다는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로 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파견국으로 잠비아를 선택했다.
교육 막바지에는 “이제 곧 아프리카로 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때의 나는 꽤 단단해진 줄 알았다. 마음도, 각오도, 계획도.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단단했던 게 아니라, 아직 깨질 일이 없었던 것에 더 가까웠다.
2011년 4월, 시카고 오헤어 공항(O’Hare)에서 체크인을 했다. 공항의 소음은 늘 비슷하다. 굴러가는 캐리어 소리, 안내 방송, 줄을 서는 사람들. 그런데 그날은 모든 소리가 좀 멀게 들렸다. 내 머릿속에는 한 문장만 계속 맴돌았다.
“진짜 가는구나.”
시카고에서 출발해 영국 항공(British Airways)을 타고 런던을 경유, 잠비아 루사카로 들어가는 긴 여정이었다. 시카고에서 런던까지는 대략 8시간. 설렘인지 기대감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이상한 건 그 8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드디어 아프리카에 간다’는 꿈이 점점 현실로 다가온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잠비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고 괜히 혼자 다짐했다.
히드로 공항(Heathrow)에 도착했을 때 환승 대기시간이 꽤 길었다. 사실 처음에는 공항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한국 국적자는 영국에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하니 환승 시간이 여유로우면 스탬프를 받아 런던 시내를 둘러볼 수 있었다. 하지만 몸도 피곤했고, 가진 돈도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환승 구역에서 버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상 밖에서 터졌다. 공항내 흡연실이 없었다. 환승까지 8시간이 더 남은 상황이었다. 지금은 담배를 완전히 끊었지만, 그때의 나에겐 그 긴 시간을 담배 없이 버틴다는 게 생각보다 큰 일이었다. 결국 공항 내 안내 데스크(information)를 찾았다. “밖에 좀 나가고 싶다”라고 했더니 왜 나가려는지를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담배가 피고 싶은데 흡연실이 없어서요!” 직원은 잠깐 나를 보더니 “reasonable”하다고 답했다. 이후 국적을 묻고 티켓을 확인하더니, 환승 시간이 충분하니 공항 밖에 나갔다 오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다만 바로 나갈 수는 없고, 일정 시간마다 보안요원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입국장으로 데려간다고 했다. 잠시 뒤 보안요원이 나타났고, 나는 작은 무리에 섞여 입국장으로 이동했다. 티켓을 다시 보여주고 여권에 영국 입국 스탬프를 받았다.
그런데 입국심사장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UK/EU/Others' 그곳에서는 미국도 한국도 결국 Others였다. 이상하게도 그게 좀 웃겼다. 세계 최강국도 여기서는 ‘그냥 기타’로 분류되는구나.
처음 계획은 단순했다. 담배 한 개비만 태우고 다시 공항으로 들어가는 것. 그런데 막상 공항 밖으로 나오니 다시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지금 들어가면 또 몇 시간을 못 피울 텐데, 여기까지 나와서 다시 들어간다고?” 그 생각이 계속 발목을 잡았다. “그럼 시내를 잠깐 나갔다 올까?”
문제는 헉소리 나는 영국의 물가였다. 공항철도(혹은 지하철) 왕복 금액이 생각보다 부담스러웠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약 10파운드(당시 환율 기준 약 17,700원)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영국 물가는 비싸구나”하며 망설이고 있던 그때, 한 커플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혹시 지하철 티켓이 필요하세요?” 내가 살지 말지 고민 중이라고 하자, 그들은 자기들 티켓을 선뜻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까지 쓸 수 있는 무제한 티켓이에요. 저희는 이제 필요 없으니 이걸 쓰세요.”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날의 짧은 런던 여행은 사실상 그 커플이 선물해 준 셈이었다.
일단 그 티켓을 들고 무작정 지하철에 올라탔다. 남은 환승 시간과 노선을 보니 빅벤이나 첼시까지 욕심내기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사우스 켄싱턴(South Kensington) 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역사 지구였다. 대표적인 역사적 건축물들이 즐비한 거리, 영국 전통 양식의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작고 아담한 경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동화 같은 배경에 장난감 같은 차들이 섞여 있는 풍경이 묘하게 잘 어울렸다.
빨간 전화부스, 빨간 2층 버스, 자전거 대여소.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던 런던의 ‘상징’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는 느낌이었다. 역시 나오길 잘했다.
걷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공항 ATM에서 딱 10파운드만 뽑아 둔 상태라, 최대한 저렴한 곳을 찾고 있었다. 마침 눈에 들어온 가게가 Little Japan이었다. 6~7파운드짜리 벤또(작은 도시락)를 하나 시켜 먹고, 남은 돈으로 200ml짜리 작은 콜라 한 캔을 샀다. 그걸로 거의 끝이었다. 또 한 번 영국의 높은 물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비록 거창한 런던 관광은 아니었지만, 그날의 나는 그 정도가 딱 좋았다. 환승 중에 잠깐 숨을 고른 느낌이랄까.
식사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탑승 시간까지 3시간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서둘러 전철을 타고 다시 히드로 공항으로 돌아왔다. 공항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시간은 여유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를 더 태운 뒤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시카고에서 런던까지도 8시간의 긴 비행이었는데, 런던에서 루사카까지는 더 멀었다. 하루 종일 걷고 움직인 덕분인지 비행기에 타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때의 잠은 피로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내 안에서 커지던 긴장을 잠깐 꺼두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10시간 남짓 뒤, 나는 드디어 잠비아의 루사카 공항에 도착했다. 한 나라의 수도 공항이 이토록 작고 초라할 수 있을까? 그곳에 발을 내딛는 순간, 비로소 나는 ‘아프리카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런데 진짜 ‘아프리카’는 공항 밖에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