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유치원 교사 워크숍을 마치고 Children’s Town의 숙소에 머무르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오지 마을로 파견을 가기 전, 잠깐 숨을 고르던 시기였다. 그날은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그때 아이들 몇 명이 교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지금은 불교 신자가 되었지만, 어릴 때는 부모님을 따라 제법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여름성경학교에서 달란트를 모으고, 부모님을 따라 새벽기도를 다니기도 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인지 교회라는 공간은 낯설기보다 오히려 익숙한 쪽에 가까웠다.
잠비아를 겪어보니, 그 나라는 기독교의 색채가 무척 강했다. 일요일이 되면 마을 곳곳에서 찬송가 소리가 들렸고, 사람들의 일상에도 신앙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었다. 그래서 잠비아 시골에 머무는 동안에는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사람들을 따라 교회에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잠바아에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SDA)를 믿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는데, 그들은 토요일에 예배를 드렸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그저 별생각 없이 아이들을 따라나섰다. 나는 이미 불교로 개종한 상태라 기독교에 대한 특별한 신앙심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또 교회에 함께 가 예배를 드리면 자연스럽게 현지 주민들과도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과 함께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내가 한국에서 떠올리던 ‘교회’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멀리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십자가 첨탑이 아니라, 낮게 내려앉은 초가지붕이었다. 흙벽으로 지은 작은 건물 하나가 햇빛 아래 조용히 서 있었고, 벽면에는 큼지막한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는 희미하게 UCZ(United Church in Zambia)라는 글자도 보였다. 겉모습만 보면 교회라기보다 누군가의 집이나 마을 창고에 더 가까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박한 모습이 더 오래 눈에 남았다.
예배당 주변도 조용했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안에 들어가기 전 잠시 쉬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미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건물은 작았지만, 그 작은 공간이 마을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제단이었다. 번듯한 나무 강단이 아니라, 흙과 시멘트로 투박하게 올린 직사각형 제단이었다. 그 위에는 흰 천이 덮여 있었고, 중앙에는 붉은 십자가가 수놓아져 있었다. 양옆에는 알록달록한 조화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그 소박한 장식이 오히려 더 오래 눈에 남았다.
벽은 매끈하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면 갈라진 흔적도 있었고, 손으로 바른 흙벽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벽 한쪽에도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고, 그 아래로 작은 창문 비슷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두운 실내를 겨우 밝혀주고 있었다. 창문이라고 해도 유리창이 달린 형태는 아니었다. 그저 빛과 바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큼만 벽을 비워둔 정도였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지붕 안쪽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굵고 가는 나뭇가지들을 엮어 틀을 만들고, 그 위를 짚으로 덮어 올린 초가지붕이었다. 정교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는 분명 손으로 만든 질서가 있었다. 누군가가 직접 나무를 깎고, 얹고, 묶고, 덮어 만든 지붕.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앉는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반질반질한 교회 의자는 없었다. 나무를 거칠게 다듬어 만든 긴 벤치 몇 개가 전부였다. 그런데도 그 투박한 벤치와 흙바닥, 흙벽과 초가지붕은 서로 이상하리만치 잘 어울렸다. 모든 것이 부족해 보였지만, 동시에 그곳에 꼭 맞는 형태이기도 했다.
예배가 시작되었는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설교할 목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순서를 잘못 이해한 줄 알았다. 누군가가 앞에 나와 찬송을 시작하면 모두가 따라 부르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나와 기도하고, 다시 노래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목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그 예배당에는 목사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목사가 없어도 예배는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건 꼭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시골 오지로 갈수록 이런 상황은 비슷했다. '클리닉'이라 불리는 작은 병원에는 의사가 없고 간호사만 겨우 한 명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목사 없는 작은 예배당들이 적지 않았다.
누군가 앞에 나와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하면 모두가 함께 따라 불렀다. 한 사람이 끝내면 또 다른 사람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악기라고 해봐야 단순한 박자나 손뼉 정도였는데도 분위기는 조금도 비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했다. 중요한 건 정확함이 아니라 함께 부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찬송가는 끝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던 찬송가는 보통 1절, 길어야 4절 정도 부르고 끝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한 곡이 좀처럼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같은 멜로디가 오래 이어졌고, 누군가 한 소절을 길게 끌면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받았다. 흙벽에 부딪힌 목소리가 예배당 안을 천천히 맴돌았다.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 초가지붕 아래의 어둠, 그리고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노래. 그 순간의 공기는 내가 익숙하게 알던 종교 공간의 공기와는 많이 달랐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실 잠비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무렵에는 매일매일이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이 긴 찬송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지?" 잠시 지루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계속 듣고 있으니 그 긴 노래는 단순한 찬송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함께 실어 나르는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가사의 뜻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만큼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감동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몇 분 동안의 내 감정은 오히려 지루함에 가까웠다. 나는 아직 그곳의 시간을 모르는 사람이었고, 왜 저렇게 오래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이었다면 누군가 슬쩍 시계를 보거나, 순서를 좀 줄이자는 눈치를 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끝나면 끝나는 것이고, 계속되면 계속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비아의 시간은 늘 내 예상보다 길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은 그 길이를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느린 반복 속에서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는 비효율처럼 보였던 시간이, 그들에게는 서로를 붙들어주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의 삶은 결코 넉넉하지 않았다. 전기가 없는 집, 멀리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야 하는 하루, 늘 부족한 벽돌과 지붕 슬레이트,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도 빠듯한 현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작은 흙벽 예배당에 모여 긴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르는 동안만큼은 얼굴이 조금 달라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잠깐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히브리서 11장 1절
어쩌면 믿음이란 많이 가진 사람의 욕망이 아니라,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루를 살아내게 만드는 힘인지도 모른다. 내일이 지금보다 나아질지 알 수 없는데도, 오늘을 버티게 하는 어떤 마음 같은 것.
물론 그때의 나는 그들의 믿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외부에서 잠시 들여다보는 사람에 불과했고, 그들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분명히 느낀 것이 하나 있었다. 그들에게 종교는 단순한 일요일 오전의 의식이 아니라, 불확실한 하루를 견디게 하는 삶의 방식의 일부라는 것을.
예배가 끝났을 때도 정확히 언제 끝난 건지 알기 어려웠다. 누군가 “이제 끝입니다”라고 선언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노래가 잦아들고, 사람들은 천천히 흩어졌다. 누군가는 나무 그늘로 가 앉고, 누군가는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끝났다.
나는 예배당 밖으로 나오며 잠깐 그 건물을 다시 돌아봤다. 강한 햇빛 아래 초가지붕은 더 커 보였고, 흙벽에 그려진 십자가는 단순했지만 또렷했다. 멀리서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건물이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곳은 분명, 마을 사람들이 자기 삶을 기대고 서 있는 장소였다. 그날 이해한 것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나는 잠비아 사람들이 세상을 견디는 한 방식을 조금은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