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차 예약에만 두 시간

그 시절의 인도 여행: 2005년 뭄바이

by 비주류여행자

연착으로 악명 높은 인도의 기차.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면 기차표 예매는 물론, 열차의 실시간 위치와 도착 예정 시각까지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2005년의 인도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와이파이도 낯설던 아날로그의 시대. 기차표를 예매하려면 반드시 기차역의 예약 창구로 가서 종이로 된 ‘Railway Reservation Form’을 손으로 직접 작성해야 했다. Papaer work의 나라인 인도답게 기차표를 예약하기 위해서는 탑승객의 이름, 성별, 기차의 출발역과 도착역, 열차의 이름과 번호, 좌석 등급, 출발일 등 온갖 정보를 빼곡히 기입해야 했다. 문제는 그 많은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약 폼.jpg 인도의 기차 예약 폼


그때 필요했던 것이 바로 ‘타임테이블’. ‘Trains at a Glance’라는 이름의 책자였는데, 말하자면 인도 전역의 모든 기차 정보를 빼곡히 담은 열차 백과사전이었다. 1년에 한 번 개정되는 이 책은 기차 이름과 번호, 주요 정차역과 출발·도착 시각, 좌석 등급 등 인도 기차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 문제는 영어가 익숙하지 않던 당시의 내게는 이 책이 마치 해독 불가능한 암호서와 같았다는 것이다. 타임테이블을 사서 펼쳐든 순간부터 모든 것이 낯설었다. 페이지를 가득 메운 빽빽한 영어 문장들. 어느 열차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어떤 등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어쩌면 그 혼돈의 시작이 바로 ‘진짜 여행’의 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두꺼운 영한사전을 펼쳐 한 단어씩 의미를 짚어 나갔다. ‘Sleeper’가 뭔지, ‘AC 2-tier’는 또 뭔지. 그러다 모르면 기차역의 역무원에게 손짓 발짓으로 물었고, 주변의 다른 여행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치 빈칸을 채우는 퍼즐처럼, 낯선 단어들을 하나씩 이해하고 열차 정보들을 맞춰 나갔다. 그렇게 두 시간의 긴 사투 끝에, 드디어 뭄바이에서 고아로 향하는 기차표 한 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기뻤다. 그리고 동시에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언어라는 도구 없이 너무 먼 길을 떠나온 것이었다. 그날 이후, 한국에 돌아온 나는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단지 여행을 더 편하게 하겠다는 실용적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사람들과 조금 더 깊이 연결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컸다. 그 작은 결심이 나의 여행을 지도를 넘어 ‘언어와 사람, 그리고 삶’으로 확장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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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인도 기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책이다. 현재는 e-book으로도 판매하고 있다. 기차의 이름, 번호, 운행 등급, 정차역 및 정차 시간 등의 정보를 수록하고 있다.




SV405991.JPG 2005년 1월의 뭄바이 CTS 기차역



우리가 예약한 기차는 뭄바이의 ‘VT역’—빅토리아 터미너스에서 출발하는 열차였기에 다행히도 정시에 출발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올라탄 인도의 기차는 낯설면서도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특히 난생처음 본 침대 기차는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다. 우리가 이용한 좌석은 배낭여행자들이 주로 선택하는 SL(Sleeper Class). 에어컨은커녕 창문에는 커튼조차 없어, 창을 열어 놓으면 뜨거운 바람과 먼지가 그대로 얼굴을 때렸다. 좌석은 낡았고, 시트는 얇았지만, 그 안에는 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인도만의 정취가 가득했다.


기차는 달렸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낯선 풍경은 마치 낡은 필름 사진처럼 내 마음을 자극했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먼지 섞인 뜨거운 바람. 그리고 “짜이~, 짜이~, 짜이~”를 리듬감 있게 외치며 차를 팔러 돌아다니는 짜이 아저씨의 목소리. 그 모든 풍경은 지금도 내 기억 깊은 곳에 아련하게 남아 있다. 그렇게 인도의 기차는 내게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였고,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진짜 여행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SV406093.JPG 2005년 1월, 뭄바이에서 고아로 가던 첫 기차의 SL등급의 침대칸


SV406078.JPG 잠시 정차한 어느 작은 기차역의 플랫폼, 나무로 된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런데 예약보다 힘든 것은 목적지에 제대로 내리는 일이었다. 우리는 고아의 주도인 빤짐(Panjim)을 목적지로 삼고 있었지만, 기차역 이름은 ‘빤짐역’이 아니었다. 고아에 도착하기 전, 기차 안에서 주변 여행자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던 우리는, 기차가 어느 역에 도착하자 많은 여행자들이 짐을 챙겨 내릴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는 “아, 여기가 고아구나!” 하고 무작정 따라 내렸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가려던 곳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구글맵이든 IRCTC 앱이든, 실시간으로 기차 위치부터 정확한 도착역, 택시 연결까지 뭐든 가능한 세상이지만, 당시의 우리에겐 와이파이도, 스마트폰도, 정보도 없었다. 심지어 목적지가 적힌 표를 들고도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몰라 역 이름조차 외국어로 들리는 그 낯선 땅에서 허둥지둥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려서야 알았다. 여긴 고아의 북쪽 해안에 가까운 마르가오(Margao)라는 역이었다. 우리가 가려던 빤짐은 기차가 가지 않는 곳, 그러니까 우리는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도시였던 것이다.


그렇게, 여행 초보자의 첫 기차는 출발도 어렵고 도착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삽질 하나하나가 인도라는 나라를 여행하는 참맛이 아니었을까. 인도에서 처음 경험한 혼돈의 미학, 그 시작은 ‘내릴 곳도 모른 채 따라 내린’ 그 기차역 플랫폼 위에서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