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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Aug 13. 2020

프랑스와 독일: 68 운동의 결정적 사건과 5월의 폭발

(이 글은 68 운동에 대한 이해와 학습을 위해, 한국프랑스철학회에서 68운동 50주년을 맞아 발간한 『철학, 혁명을 말하다』의 1장 "프랑스와 독일: 68혁명의 결정적 사건과 5월의 폭발"(정대성)을 편집한 발제문임을 밝힙니다.)



  굳이 맑스주의자나 좌파가 아니더라도, 68 운동을 근대성의 재구축, 혹은 유럽 국민국가들이 맞이한 ‘제 2의 건국’ 시기라 보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시민사회의 근본을 다시 물었던 이 문화 혁명은 전 세계에서 자기의 지형을 다져갔는데, 68 운동의 구심점은 프랑스의 빠리와 독일임이 분명했지만 그것의 전선은 월러스틴적 관점에서 ‘세계혁명’이라 규정해도 손색 없을 정도로 ‘국제적으로’ 펼쳐졌다. 베트남전에 맞서는 반전 시위의 물결은 온 유럽의 대도시를 뒤덮었고, 프랑스에서는 학생과 노동자의 연대가 천만에 가까운 노동자의 역사상 유례 없는 대파업으로 번져간다. 일본에서는 전투적 학생 시위가 벌어지며 ‘신좌파’라는 새로운 담론적 지형을 구축하는 데에 기여했고, 미국에서는 히피 운동이 주류 사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반대, 그리고 반제국주의 운동과 결합하며 거대한 반문화로 뻗어져 갔다. 이제 68운동은 ‘학생 반란’, ‘세대 반란’, ‘문화혁명’, ‘집단적 나르시시즘’, ‘낭만적 역행’ 등 다양한 수사들을 통해 인식되고 기억된다.


  이러한 68 운동의 거대한 흐름은 무엇으로부터 촉발되었으며, 어떤 성격과 양상으로 진행되었는가? 68 운동은 어떻게 종결되었고, 이후 시민사회와 아카데미의 담론적 지형을 어떻게 재구축해 갔는가? 68 운동은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


1. 68 운동의 전사: 68 운동의 사회문화적 조건과 근대성


  68 운동을 촉발한 사회문화적 조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68 운동 이전 유럽인들의 관념과 사고를 지배하던 세계가 무엇이었는지, 시대정신(zeitgeist)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는 결국 근대와 근대성(modernity)의 문제로 환원된다.


  가령 독일 관념론의 대표주자인 헤겔은 ‘근대’를 종교개혁, 시민사회, 계몽과 같은 것들로 특징지어지는 하나의 시대이자 세계로 보았다. 관념론자인 헤겔은 어떠한 시기의 시대정신을 곧 그 시대로 이해했는데 이렇게 구성된 이데올로기로서의 근대성은 전근대에 대한 반동이다. 전근대 서구는 신앙에 인간이 종속된, 주체로서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헤겔의 입장에서 신앙적 세계관의 노예였던 인간은 종교개혁을 통해 사상적 주체로서 해방되고, 중세 봉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민 개념과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구성을 통해 사회적 주체로서 해방된다. 한 편으로 신앙적 세계관으로부터 개인을 구출해내어 이들을 사고와 실천의 주체로 격상시키려면 이것의 기제인 이성을 발견해내는 과정이 필요할 텐데, 이 역할을 했던 건 바로 계몽사상이다. 중세까지 서구 사회의 모든 지식은 교회에서 생산되었고, 또 이렇게 생산된 지식은 교회에 의해 독점되었는데, 계몽 사상은 교회가 독점하던 신앙 체계로서의 지식을 찬탈해와, 모든 시민들이 그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기서 계몽 사상은 시민들을 이성을 토대로 판단하고 사고하는 존재로 규정해서, 자유의지에 따라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헤겔의 분석을 정리하면, 근대라는 시대정신의 핵심은 중세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난 시민의 발견, 그리고 그러한 시민을 존재 가능하게 하는 합리적 이성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겠다.


  헤겔의 분석은 꽤나 일리가 있지만, 관념론자인 헤겔의 설명만으로 근대라는 시대가 어떻게 직조되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근대라는 시대정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러한 시대정신의 물적 토대를 제공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맑시즘의 사유, 사적 유물론을 동원해보자. 핵심은 사회적 생산이 토지라는 생산수단에 매여서 이루어지던 중세 봉건사회가, 사회적 생산이 자본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다는 데에 있다. 교회적 세계관은 토지를 독점한 당시의 지배계급, 봉건 귀족들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교회를 통해 지식을 독점한 봉건 귀족들은 피지배계급의 무지에 기초해서 권력을 유지해올 수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토지 이외에도 막대한 사회적 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단, 예컨대 공업과 상업 등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적 부를 축적했지만 낡은 체제의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이들이 당시의 부르주아지, 즉 자본가 계급이다. 이들은 스스로가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근대성이라는 시대정신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시민이다.” 라는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대성과 이성주의의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끔찍한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들, 예컨대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라는 계기로 인해 비관적 사유의 도전을 받으며 근본부터 의문시된다. 아우슈비츠는 사회적 소수자들을 효율적으로 절멸시키기 위해 근대적 관료제와 행정 시스템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결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효율적 학살을 위해 과학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킨 결과였다. 이는 ‘이성을 전제로 했던 서구 문명이 수행했던 야만과 비이성’이라는 모순적 상황을 지시했다. 


  서구 문명과 근대의 실패라는 테제 앞에서 지식인들은 두 가지의 행태를 보였다. 한편으로 연극이나 영화와 같은 예술에서 부조리와 소통 불가능성이 일상적 주제가 되었다. 이는 직접적으로 서구 문명에 대한 좌절과 절망, 거부의 몸짓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론가들은 좀 더 세련된 형태의 비관, 즉 냉소로 대응했다. 그러한 냉소에는 지식인들 특유의 감수성으로는 감당하기 벅찬 죄의식이 있었다. 요컨대 그들은 ‘세계를 변혁하기를 포기했다’. 더 나아가, 무언가를 실천하려는 시도 자체가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 서구권의 좌익 운동을 주도했던 프랑스에서, 공산당은 2차대전 중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기여로 지지를 얻어 전후 과도내각에 참여하고 제4공화국 제헌의회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며 원내1당의 지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한 편으로는 코민테른 체제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성찰 없는 지지,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현장에서의 미온적 실천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현실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학문’이라는, 앙가주망이라는 지식인의 실천론을 자기의 주요한 테제로 삼고 ‘인간주의적 사회주의’ 이론을 구축하며 대중운동에 개입하려 했던 사르트르를 제외하면, 학계-운동-대중이라는 삼각형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축이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2. 68운동의 전사: 68을 야기한 결정적 사건과 저항의 연대


  삐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저서 『호모 아카데미쿠스』에서 다양하게 잠재된 위기의 동시화(synchronization, ‘공시화’)를 거치며 혁신적인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결정적 사건(événement critique)을 말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역사적인 사건이 ‘결정적 사건’으로 전화되지는 않는다. 이질적인 사회 주체들의 경험과 인식을 동시화함으로써 다양한 사회적 장(champ)에 포진된 잠재적 위기를 서로 중첩시키는 사건들만 ‘결정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나아가 결정적 사건은 일상이나 관습 및 통상적인 시대 인식과의 단절을 야기해 개인이나 집단의 입장 표명을 이끌어내고 종국적으로 기대와 요구를 불어넣는다. 독일과 프랑스는 공히 68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경험한다. 그리고 프랑스 대학생이 독일 연대를 조직하여 양국의 사건들 사이에서 일정한 매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럼 먼저 불붙은 독일 68의 ‘결정적 사건’을 열어보자.


a. 독일: 6월 2일 사건과 부활절 봉기


  1967년 6월 2일, 베를린에서 독재자 이란 국왕의 국빈 방문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이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와중에 대학생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른바 ‘6월 2일 사건’이다. 특히 학생층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서베를린에 집중된 학생운동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 전 도시로 확산된다.


  6월 2일 사건은 서독과 서베를린의 학생운동 뿐 만, 아니라 서독 사회운동의 연합체였던 ‘의회외부저항운동(Auβ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이하 APO)’ 전체의 전환점이었다. 우선 항의 도중에 처음으로 시위자가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중대한 사건이 된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 서독이 위치한 지점에 대한 의구심에 근거해 ‘새로운 시대 인식’을 창출하고, 권위주의와 국가폭력에 물들지 않은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일깨웠다. 운동의 주체와 참가자들은 6월 2일 사건의 의미를 분석하고 진단해, 서독이 파시즘으로 후퇴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대연정이 준비중인 ‘비상사태법’이 불러올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입장 표명’을 쏟아냈다. ‘새로운 사회정치적 구도’를 만들고, ‘새로운 행동 방식’을 앞세운 시위와 저항이 만발한다. 당시 운동의 주요한 의제는 다음과 같다.


- 국가 비상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비상사태법 반대 운동


- 운동 비방에 매진해 온 보수 언론 슈프링어사 반대 캠페인


- 대학 개혁


- 베트남 전에 대한 비판과 반전 시위


  이듬해 1968년 4월에, 두 번째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다. 4월 11일 부활절 목요일에 68의 아이콘인 루디 두치케가 서베를린에서 극우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운동 진영은 언론 기업 슈프링어사에 책임을 돌렸는데, 이는 슈프링어 신문이 수년간 학생운동과 두치케에 대한 비방 기사를 쏟아내며 증오를 부추긴 결과라는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슈프링어 신문에 대한 분노와 시위의 물결이 분출했다. 부활절 기간 동안 서독 전역에서 슈프링어 인쇄소 봉쇄가 시도되었고,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경찰과의 가두 투쟁이 불붙었다. 이른바 ‘부활절 봉기’였다.


  ‘부활절 봉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 발생한 적 없던 경찰과 시위대 사이의 대규모 시가전으로 이어졌다. 이 동안 총 27개 도시에서 매번 5,000명에서 1만 8,000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대략 총 10만명이 거리로, 저항으로 나섰으며, 부활절 당일에는 30만명이 행진에 참가했다. 이 결정적 사건을 통해 독일 68은 동원의 절정으로 달려갔고, 이 소식은 프랑스로도 전해진다. 두치케 암살 기도 사건이 벌어진 직후, 빠리의 대학생들은 항의 연대 시위를 조직했고, 평소 왕래가 없던 학생 조직들 사이에서 공조 활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b. 프랑스 대학생들의 독일 연대


  1968년 4월 11일 서베를린에서 발생한 두치케 암살 기도는 독일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유럽 및 비유럽 대도시에서도 격한 분노를 야기했다. 영국의 역사가 프레이저(Ronald Fraser)는 이런 상황을 놓고 “일국의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 국제적인 학생 저항으로 이어진 최초의 경우”라고 썼다. 그에 걸맞게 분노의 공감은 실로 국제적이었다. 사건 다음 날인 4월 12일부터 약 일주일가 뉴욕, 워싱턴 D.C., 스톡홀름, 토론토, 암스테르담, 브뤼셀, 베른, 취리히, 로마, 베오그라드, 빠리, 런던, 밀라노, 텔 아비브, 오슬로, 코펜하겐, 프라하, 빈 등에서 두치케 암살 기도를 규탄하고 독일 대학생과의 연대를 천명하는 시위가 펼쳐졌다.


  빠리에서의 반 슈프링어 캠페인이 무엇보다 스펙터클했다. 독일 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13일의 연대 시위에서는 천 여명의 청년들이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다음과 같이 합창으로 외쳤다. “루디 두치케”, “SDS(Sozialistische Deutsche Studentenbund, 독일 사회주의자 학생 연대 – 독일 사회민주당의 청년 대학생 조직)와 연대를”, “슈프링어는 살인자, 키징거는 공모자”, “SDS는 승리하리라”. 또한 “로자 룩셈부르크 1919, 루디 두치케 1968”, “제국주의-테러-베트남-멤피스-베를린”이라 적힌 플래카드가 동원되고 적기가 휘날렸다. 파리의 독일 학생이 SDS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이 연대 시위는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뒤이어 경찰기동대와의 가두 투쟁이 전개되어, 시위자들이 체포되고 경찰이 몇 명 다쳤으며 경찰차도 파손되었다.


  나아가 19일에는 빠리에서 두 번째 연대시위를 열기로 결의되었는데, 이를 위해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접촉이 전혀 없던 여러 정치적인 좌파 학생 조직이 처음으로 만났다. 또한 거의 모든 좌파 학생 조직이 공동의 저항 행위에 처음으로 합의했다. 이 연대 시위는 참가자가 몇 배로 불어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독일의 ‘비상사태법’을 비판하고 항의했으며, 프랑스의 보수 일간지 『르 피가로』와 국영방송 ORTF를 독일의 슈프링어와 결부시켰다. 4월 15일자 『르 몽드』에서는 슈프링어사의 ‘신문 독재’가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고, 서베를린에서 ‘점거 분위기’가 급속학 고조된 상황에 슈프링어사의 책임이 있다고 썼다. 


  이렇듯 독일의 ‘결정적 사건’인 두치케 암살 기도는 빠리 학생운동의 흐름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간 별다른 소통이 없던 좌파 학생운동의 여러 정파를 처음으로 단결시키고 공동 행동을 이끌어낸 탓이다. 독일과 프랑스 대학생들의 연대는 68을 분출하기 위한 에너지 비축에 일조했다. 이제 ‘바리케이드의 밤’이 열린다.


c. 프랑스: 바리케이드의 밤


  사실 프랑스에서 불어닥친 68년 5월의 폭풍우는 누구도 내다보지 못한 반란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리는 지루하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들려왔다. 소요로 들끓어 오르던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프랑스 대학은 오래도록 조용했다. 물론 반란의 기미가 없지는 않았다. 1968년이 아니라 이미 60년대 들어 징조가 보였다. 무엇보다 엘리트 계층으로의 직행 코스로 간주된 대학에서 상황이 변하며 균열의 조짐이 있었다. 1960-67년 사이 프랑스에서 대학생 수가 130% 증가하는 동안 이를 뒷받침할 만한 대학의 제반 여건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부르디외의 연구가 보여주듯 대학은 사회계층의 이동 가능성을 별로 높이지 못했고, 성공에 결정적인 것은 원래 가지고 있던 ‘문화자본’이었다. 불만이 쌓여갔다.


  고조되던 불만은 68년에 거세게 폭발한다. 빠리 근교 낭테르 대학의 아나키스트 그룹과 트로츠키주의 그룹, 마오주의 그룹이 연대한 ‘3월 22일 운동’에서 시작된 저항의 불꽃은 5월 3일에 빠리 소르본대학으로 번져간다. 소르본에서의 시위가 폭력적으로 강제 해산되고 대학이 폐쇄되자, 저항은 라탱 지구로 재차 확산된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은 시민들을 움직였고 정부를 바짝 압박해 들어갔다. 그 모든 소용돌이의 결정적 발화점은 5월 10일에 일어난 ‘바리케이드의 밤’이었다.


  라탱 지구에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일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5월 10일에 청년 및 학생들은 평화 시위를 이어가다, 라탱 지구의 한 구역을 즉흥적으로, 놀이하듯 점거해 60개의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파리코뮌의 바리케이드를 모방한 이들의 바리케이드는, 도구적인 성격이 아니라 상징적이고 표현적인 성격을 가졌다. 이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았다.


- 시위 도중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


- 폐쇄된 소르본대학의 재개방


- 경찰의 라탱 지구 철수


  10일 밤을 지나 11일 새벽 진압 명령이 떨어지고, 진압 작전은 과도한 폭력과 파괴로 점철되었다. 야만적인 경찰력 투입은 미디어를 통해 시민들에게 큰 분노의 반향을 일으킨다. 바리케이드의 밤이 ‘결정적 사건’으로 기능한 데에는 대중매체의 역할이 특히 컸다. 첫 번째 바리케이드 설치 직후 현장으로 달려온 두 대의 라디오 방송 차량이 사건을 생생하게 중계했고, 학생들의 대응과 목소리가 포함된 현장의 긴박한 상황은 라디오를 타고 시시각각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라디오로 생중계된 경찰의 강경 진압은 여론의 분노를 등에 업고 노동조합이 학생운동과 연대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노동조합이 경찰의 폭력 진압에 항의하며 요구 사항에 힘을 실어주었고 전국적인 24시간 총파업을 호소한다. 프랑스의 학생운동은 ‘바리케이드의 밤’이라는 사건을 통해 프랑스의 ‘불타는 5월’을 견인하고 촉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프랑스 전체를 뒤흔들고 마비시킨다.


3. 68 운동: 두 개의 5월


a. 프랑스: 결정적 사건에서 결정적 순간으로


  프랑스의 ‘5월 사건’이 파리코뮌 이후로 서유럽에서 펼쳐진 가장 중요한 격변에 속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수십만의 학생이 경찰과 주기적으로 가두 투쟁을 하고, 9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돌입했다. 반란의 상징인 적기와 흑기가 점거된 공장, 대학, 기차역, 극장, 백화점, 호텔에서 휘날렸다. 총리 퐁피두가 이끄는 정부는 학생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상황이 잦아들거라 기대했지만 시위자들은 정바대로 오히려 요구 수준의 확대와 강화로 대응했다. 노동자들은 학생들의 요구에 대한 지지를 넘어


- 교육의 민주적 개혁


- 완전 고용


-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경제 제도로의 대전환


을 요구하고 촉구한다. 단결과 연대의 힘을 자각한 운동 세력은 대학 사회를 훌쩍 뛰어넘어 사회 전 부분과 영역으로 민주화를 확대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이는 5월 13일 최초의 총파업으로 폭발하기 시작했고, 이후의 동원 성공과 연쇄 폭발은 더더욱 명백해진다. 노동자들은 총파업 이후에도 직장을 점거했고, 소르본대학은 다시 개방되자마자 빠리 학생들에게 점거되었다.


  프랑스를 뒤흔든 ‘결정적 순간’의 정점에서 ‘자주 관리(autogestion)’라는 구호가 솟아오른다. 신좌파 성향이 강한 ‘프랑스민주노동동맹(CFDT)’이 5월 중순에 처음 내건 이 슬로건은 다소 모호하고 열려 있는 표현이지만, 반위계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내용을 통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단결시킬 수 있었다. ‘자주 관리’의 요구는 구좌파의 고전적인 변혁 전략과는 구분되었다. 즉 소유관계나 재산 관계가 아니라 권력 구조와 결정 구조가 중심에 놓였던 것이다. 이는 공장의 관리와 결정에 있어 민주화 및 각 기관이 가진 독점적 권한의 해체, 지배와 위계의 해체, 자결과 자치를 통한 노동자의 자기해방을 추구했다. 다시 말해 ‘자주 관리’는 타율성에서 자율성으로 전환하고, 민주적 자기 결정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이런 ‘자주 관리’의 실험은 5월의 정점에서 수많은 기업, 공장, 대학, 문화 기관에서 진행되었다.


“상상력이 권력을 인수한다! 거리에서 분출한 노동자와 학생의 혁명적 투쟁은 이제 작업장과 소비사회의 사이비 가치에 대한 투쟁으로 번지고 있다. 어제는 낭트의 ‘쉬드아비아시옹’ 항공기 공장에서, 오늘은 이른바 오데옹의 ‘프랑스극장’에서.”


“연극, 영화, 미술, 문학 등등은... ‘엘리트’가 소외와 중상주의 그 자체의 목표로 타락시켜버린 산업이 되었다. 문화 산업을 사보타주하라! 문화 산업 기관을 점거하고 파괴하라! 삶을 새로이 창조하라! 예술, 너희들이 그것이다! 혁명, 너희들이 그것이다!” - 68년 5월 15일, 빠리 오데옹극장을 점거한 예술가와 학생 주체들의 결의문.


  예술가들과 학생들에 의해 점거된 오데옹극장은, 관객과 참가자의 거대한 토론의 장이자 자기 연출의 광장으로 변모했다. 오데옹극장의 점거 주체들은 정치적 항의를 넘어 문화적 항의가 사람들을 움직인다고 생각했기에, 새로운 형태의 의사소통과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위의 결의문은 한마디로 ‘상상력에 대한 호소’였다.


  점거된 소르본과 오데옹극장을 수놓은 상상력 넘치는 숱한 슬로건과 그라피티는 반란의 정신을 거듭 고무시켰고, 문화 산업에 대한 사보타주로도 이어졌다.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결정적 순간’의 만개 속에서, 진정한 ‘위기의 순간’이 도래했다. 퇴진과 은퇴를 고민하던 대통령 드골이, 군대의 지지를 확인하고 돌아온 뒤 5월 30일 국회 해산과 재선거라는 승부수를 던졌던 것이다. 선거라는 의제가 돌출하자 정당을 중심에 놓는 제도화된 정치가 무대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반면, 애초에 제도권 밖에서 분출된 운동의 동력은 차츰 힘을 잃어간다.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가고, 대학도 ‘정상화’의 길을 걷는다. 사분오열하던 좌파는 분파로 되돌아갔다.


b. 독일: 동원 정점에서 쇠퇴로


  프랑스의 5월이 폭발하는 동안, 이웃 독일도 저항의 물결로 뒤덮인다. 부활절 봉기 이후, ‘비상사태법’ 반대 운동이 새로운 동력이 되었다. 이 법은 전쟁이나 여타 비상사태의 경우 전화 도청이나 편지 검열 등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행정부에 예외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치법’이나 ‘독재법’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파시즘이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는 우려를 부추겼다. 독일 68의 구심체인 APO는 4월의 부활절 봉기가 잦아들자 다름아닌 비상사태법 반대 투쟁에 주력했다.


  5월 말로 예정된 비상사태법의 국회 통과를 막기 위해 대규모 시위가 준비되었고, 5월 11일 전국에서 수도로 결집하는 ‘본(Bonn) 집결 행진’이 결행된다. 전국에서 6만명이 모인 이 집회는 완전한 성공이자 비상사태법 반대파의 평화적 절정으로 여겨졌지만, 독일노조총연맹(DGB)은 같은 날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도르트문트에서 집회를 따로 진행했다. 비상사태법 반대 운동의 분열은 분명했고, 노조는 사회운동진영, APO로부터 분명히 ‘퇴각’했다. 5월 17일 제2독회에서 비상사태법이 압도적 다수로 통과되자 SDS는 노조에 파업 서신을 보내 비상사태법 최종 입법에 맞서 5월 29일 하루 간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그러나 DGB는 “절대다수로 통과된 의회 결의안에 맞서 파업을 호소하는 것은 의회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위반”이라 보며 파업을 거부했다. 


  결국 5월 30일 비상사태법은 최종 통과되었고, 반대 투쟁을 거치며 학생운동과 노동조합 사이의 관계가 무너졌으며, 노조는 독일 68의 상징적 연합체인 APO와 결별한다. 게다가 4월 부활절 동안 고양된 폭력은 여론의 변화를 낳고 이는 운동 세력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상황은 동원의 절정인 68년 4월과 5월이 결국은 저항운동 종언의 시작이자, 68의 동원 해제의 출발점임을 말해준다. 이후 6월부터 동원 해제에는 가속도가 붙고, 같은 해 11월 학생들이 경찰과 폭력적인 가두 투쟁을 벌인 ‘테겔 전투’로 인해 여론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나자 학생운동은 결정적으로 파편화와 해산의 길에 들어선다.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학생운동은 이제 대학으로 돌아가고 거기서 고립된다. 독일 68의 주도적 학생 조직 SDS는 이듬에 70년에 공식 해산한다.


4. 68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독일과 프랑스의 ‘결정적 사건’들은 두 나라 모두에서 공히 운동의 직접적인 폭발력과 동원력을 배가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만 ‘결정적 사건’이 ‘결정적 순간’으로 전환해,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이는 공간이 열린다. 이는 독일이 다음의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학생과 노동자 대표의 산발적인 연결이 전국적인 규모의 공조와 연대로 이어지지 못하여 총파업이나 노학 연대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점


- 프랑스의 5월에서 ‘자주 관리’의 마법적 공식이 솟아났던 반면 독일에서는 그러지 못한 점


  프랑스의 ‘68년 5월’은 ‘반란’을 넘어서는, ‘혁명’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일상을 포함하는 사회 전 영역에서 위계와 권위에 도전해 새로운 삶의 편재를 꿈꾼 혁명이되, 결코 끝나지 않은 ‘미완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독일에서도 ’68 이후’ 많은 것이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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