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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로자 Sep 14. 2020

'홍상수적 딜레마'


  홍상수 자신이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영화감독이 있는 반면, 홍상수의 문법을 가지고 홍상수의 한계를 극복한 영화감독이 있다. 전자가 에릭 로메르라면, 후자로는 정가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에는 그가 묘사하는 지리멸렬한 머스큘리니티로 인해 오히려 여성주의적으로 선해될 여지가 있는데, 이는 홍상수가 가장 저열하고 끔찍한 남성성에 이입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와 동시에 이를 전시하고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는 홍상수 자신의 기질이기에, 또한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예술을 자기연민적 언어로 활용하기에 어떠한 한계에 봉착한다. 홍상수와 비슷한 서사를 구축해 가지만 결코 내화되지는 않은 상태에서 이를 보편을 위한 것으로 확장시켜가는 에릭 로메르나, 홍상수가 수행하는, 남성만이 독점해 가던 섹슈얼리티적 발화와 생활양식을 여성의 것으로 재전유해오는 정가영의 영화예술에서 홍상수의 한계는 단적으로 파악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홍상수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결코 '홍상수 영화'일 수 없다. 홍상수의 영화미학은 지극히도 내화된 발화에서 구축되기 때문에, 홍상수가 자아를 지워내고 영화를 찍는다면 이는 홍상수적이지 않은 객관의 서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홍상수적 딜레마'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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