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바보들을 위한 비밀
내 나이 서른여섯, 인생에서 두 번째로 비행기를 놓쳤다. 세 번은 절-대 없으리라 다짐하며, 항공권 변경, 경유, 연착 끝에 드디어 첫 숙소로 향하는 길이다. 무사히 발리에 도착한 안도감도 잠시 발리의 교통체증을 목격하곤 알았다. 지금이 글 쓸 타이밍이로구나. 창피해서 비밀로 하고 싶지만, 그래도 나의 바보일지를 써보자.
비행기가 연착되면 수속 마감도 연장될 거라 막연히 생각한 이 바보는 체크인 줄이 길자 의자에 앉아서 브런치 글 마무리에 몰두하고, 새로 리뉴얼된 인천공항 디지털 옥외 광고 사진을 찍으면서 돌아다닌다. 그러고 부스에 가서 줄을 서는데, 이미 어플로 온라인 체크인을 했지만 모바일 탑승권 발급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줄을 안내하던 직원은 자기도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그때 케세이퍼시픽 직원이 아님을 눈치챘다면. 이 바보는 체크인 부스가 케세이퍼시픽에서 아메리칸 항공으로 바뀐 지도 모른 채 짐만 부치면 금방일 텐데 줄이 길구나- 하고 생각 없이 줄을 선다. 체크인 부스는 각 항공사마다 고정적인 위치일 거라 생각했다. 거의 코 앞에 다다러서야 무언가 잘못됨을 깨닫고 내가 부스를 잘못 왔나? 철렁하며 아닌데 여기였다 분명. 우선 줄을 이탈해서 안내데스크로 가서 케세이퍼시픽을 찾는다. 이미 체크인은 끝났고 보딩 중이라는 답변. 3시 10분에서 55분으로 연착되었고 지금은 탑승이 어렵다는 안내. 그때가 10분이 막 지날 때였나. 이렇게 허망할 수가.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케세이퍼시픽 고객센터 번호를 받았다. 체크인은 제대로 된 게 맞아서 모바일 탑승권이 있다면- 안내해 주신 직원도 어떻게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방법을 모색해 주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미 엔딩은 정해져 있었다.
이게 지금 현실인가?
아직 내 비행기가 저기 있는데, 왜 타질 못하니.
황망한 마음도 잠시 현실을 수습해야 했다. 다음 비행기로 변경하기로 했고, 좌석이 남아있는지 확인되는 동안 긴장하며 기다렸다. 다행히 다음 자리가 남아있었다. 체크인을 취소해 달라고 하는데 헤매다가 결국 항공사에서 해주기로 했다. 다음 비행기가 있다는 게 어찌나 감사하던지. 내일 홍콩에서 발리행 비행기를 타는 건 문제없다. 발리만 무사하면 괜찮다고 돼 내었다. 수습을 하기 위한 상황 파악이 끝나니 이제 남은 건 이 모든 걸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었다. 우선 변경하려면 노쇼비를 내야 했다. 변경 수수료의 3배에 달했다. 이렇게 바보 비용이 추가되었다. 결제를 마치고 8시 15분까지 뭘 해야 될까 생각했다. 가급적 어딘가 몰입해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다. 요즘 챙겨보던 드라마를 볼까 하다가 보면서 스스로가 더 싫어질 것 같아 한숨 쉬던 순간 안내데스크 뒤로 서점이 보였다.
나는 안 그래도 무거운 캐리어에 왜 책을 가져가는지 이해 못 하는 사람이다. 놀러 가서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은 누구보다 책이 절실했다. 너무나도 내가 멍청하고 한심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행동이 필요했달까. 책이라면,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세상에 공항에서 서점에 들어갈 날이 오다니. 많지 않은 책들을 쭉 둘러보고 몇 개는 집어서 몇 장 읽어보는데, 급 자신이 없어졌다. 괜히 짐만 늘어나는 거 아닐까. 서점은 책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보다 유심을 사거나 프린트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난 그 안에서 누구보다 진지하게 매대를 둘러보고 있었다. 책 하나 고르는 일이 이렇게 비장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몰입하지 못하면 짐만 될 뿐이야. 짧은 순간 내린 결론은 장르는 무조건 소설로 가자-
삼체. 친구들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 원작 소설을 먼저 볼 거라는 얘기를 했었다. 나도 마침 팟캐스트에 물리학자와 소설가들이 나와서 각자의 분야에서 삼체에 대한 의견을 나눈 것을 최근에 듣고 흥미가 생긴 터였다. 그래 이 두께를 봐. 그리고 SF라는 비현실적 주제, 그 몰입력. 삼체가 나를 구원하리!-라고 생각한 것도 찰나 어째 1권만 없다. 직원에게 문의해 봐도 다 팔린 게 맞다. 공항에서 이 두꺼운 책을 모조리 사간다니. 설마 나처럼 비행기를 놓치는 바보들은 아니겠지? 또 쓸데없는 상상을 하곤 아쉽지만 다른 책을 살피다가 친구가 좋다고 했던 작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김초엽’
거기다 온실? 뭔가 구미가 당겼다. 그렇게 집어든 책이 ‘지구 끝의 온실’이다. 작가님은 아실까. 제가 지금 지구 끝에 매달린 기분이에요. 근데 그 끝의 온실이라니. 풀때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더없이 완벽한 책이 틀림없다. 그렇게 정해진 나의 첫 해외 독서. 다음 타임 비행기까지의 대기시간, 홍콩에서 연착된 발리행 비행기 대기시간. 그렇게 마가 뜬 순간마다 다행히도 이 책이 있었다.
왜 여행지에서 독서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각자의 이유가 있더라도 큰 목적은 어쨌든 일상에서는 여러 일들로 미뤄왔지만 여행지에서는 조금 더 나 자신에 집중하고 싶은 게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집어든 순간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시작은 바보였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자책할 시간을 덮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서점에 간 건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비행기에서 읽는 책이 이렇게 재밌다니. 집에 가기 전까지 완독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 김초엽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볼 계획이다.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나만의 여행 꿀팁 대방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