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함께 한 구름 속 산책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 네 식구는 숲 속 부모님의 집에 가있는 날이 많아졌다. 꿩이 날아다니고, 고라니가 뛰어 놀만큼 외진 숲 속의 아침. 서울이라면 새벽 배송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겠지만, 이곳에선 자연으로부터 배달된 선물이 나를 기다린다. 꼭 파도소리처럼 들리는 산속 바람소리가 그렇고, 이슬이 촉촉이 내려앉은 산속의 짙은 흙 내음이 그렇다. 그러던 중 구름 속 세상을 선물로 받았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창밖이 온통 하얬다. 마치 온 세상이 구름 속에 잠긴 듯, 안개가 짙게 깔린 아침 풍경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나는 홀린 듯 무작정 문을 열고 나가 안갯속으로 걷기 시작했다. 시골집이 좋은 건 바로 이런 점이다, 문만 열면 바로 밖이라는 것, 평생 아파트 생활을 해온 나로선 처음 경험하는 신선 함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눈곱도 떼지 않은 나는 부지런히 따라 나온 초등학교 6학년인 큰 딸과 함께 구름 속을 산책했다.
안개에 가려진 세상은 신비로움을 넘어 살짝 두렵기까지 했다. 어릴 때 가족과 함께 소금강 계곡에서 텐트를 치고 논 적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나 싶더니 금세 사위가 어두컴컴해졌다. 아름다웠던 소금강의 풍경이 순식간에 사나운 얼굴로 표정을 바꾸는 것을 봤다. 뭔가 웅장하면서도 두려웠던 기억. 자연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을 그때 느꼈다.
분명 익숙한 풍경인데... 안개에 모습을 감춘 풍경은 나에게 경외심으로 다가왔다.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워 자꾸 끌리지만, 한 편으로는 안 보여서 무섭고 두려운... 아마 혼자였다면 멀리 가지 못하고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딸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안갯속으로 발을 내딛다 보니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익숙한 듯 다른 느낌의 풍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무심코 아이에게 말하고 보니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했다. 우리는 종종 내가 가보지 않은 길, 겪어보지 않은 사람, 살아보지 않은 세상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다. 몰라서 두렵고 막연해서 무섭고, 그러면서도 동경하고 꿈꾼다. 하지만 용기 내어 다가가 겪어보고, 그 속에서 부딪쳐보면 ‘인생 뭐 별건가.’ 싶을 때가 많다. 본질인 ‘사람’은 어디서든 비슷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낯선 세계로 첫발을 내딛을 ‘용기‘와 그 길을 기꺼이 함께 떠나 줄 ‘누군가 ‘가 아닐까, 구름 속 산책을 함께 한 큰 딸처럼 말이다.
20대에는 30대가 빨리 되고 싶었고, 30대에는 40대가 빨리 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때가 되면 보다 안정되고 뚜렷한 인생을 살게 될 거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40대가 되고 보니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안갯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모든 게 불분명하고 불확실하다. 하지만 구름 속 산책을 통해 또다시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꾸준히 걷다 보면 언젠가 안개가 걷힐 그 날이 오겠지.
풍경에 취하고, 감상에 젖은 나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보자고 자꾸 욕심을 냈다. 급기야 발이 아프다며 딸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급하게 따라 나오느라 발에 맞지도 않는 할머니 신발을 대충 꿰신은 딸의 발이 보였다. 순간 미안했다. 그리고 바로 군 걱정이 따라붙었다. 발이 아팠던 딸에게 오늘의 산책이 어떻게 기억될까? 아픈 발을 신경 쓰느라 내가 해준 말들을 허투루 흘려듣진 않았을까?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과 가슴에 잘 담았을까? 하지만 나는 딸에게 확인하지 않았다.
훗날 언젠가 오늘의 산책을 떠올리며 무릎을 ‘탁’ 칠 그날이 올 거라 믿기 때문이었다. 추억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