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의 이유 있는 자신감
아침에 정원을 둘러보던 엄마가 하신 말씀이다. 대추 꽃? 나는 언뜻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대추 꽃을 본 기억이 없었다. 내가 그동안 나무에 관심이 없던 탓도 있지만, 대추 꽃을 보는 순간 그 이유를 알았다.
어디 꽃이라고 꽃잎다운 꽃잎도 없이 암술만 남은 듯한 초라한 모양새라니. 그전에 봤더라도 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겠구나 싶었다. 산수국은 가꽃을 피워서라도 벌을 유인한다. 하물며 잡풀도 저마다의 꽃을 피워 벌들에게 매력 어필을 하건만, 대추나무는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순간 헛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대추나무의 자신감은 꽃뿐이 아니었다.
겨우내 누렇게 잠들어 있던 정원에 노란 산수유 꽃이 피기 시작하면 봄이 왔다는 뜻이다. 그때부터 정원의 나무와 꽃은 분주해진다. 나뭇가지마다 연둣빛 싹이 움트고,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씨앗들이 깨어나 싹 틔울 준비를 한다. 그러면 사람도 바빠진다. 아무데서나 쑥쑥 고개를 쳐들고 올라오는 쑥처럼, 잡풀도 함께 자라기 때문이다. 아침저녁으로 정원을 둘러보며 잡풀도 뽑아주고, 물도 주고, 관심을 기울여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분주한 4월의 정원에 유일하게 느긋한 녀석이 있었으니, 바로 대추나무였다. 모든 나무가 초록 옷을 갈아입는 동안 홀로 헐벗고 서있는 대추나무가 나는 걱정스러웠다. 작년에 대추 두 알 열린 게 전부였던 녀석이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정원을 둘러보다 대추나무에 움트기 시작한 늦장 꾸러기 새싹을 봤다. 오래 기다린 만큼 반갑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남이야 어떻든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속도로 살아가는 대추나무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두 아이를 키우는 나는 본의 아니게 두 아이를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꼼꼼하고 찬찬한 첫째는 뭐든 빠르게 배운다. 반면 덜렁대고 대충대충인 둘째는 첫째에 비해 늘 부족하고 느린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늘 둘째가 더 신경 쓰이고 안쓰럽다. 굳이 말하자면 아픈 손가락이랄까. 하지만 지나고 보면 약간의 차이일 뿐, 결국 비슷비슷하게 큰다. 마치 늦게 싹 틔운 대추나무가 초록이 무성한 지금은 다른 나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주로 나이를 잊고 사는 나도 남과 비교하며 종종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숫자를 잊으라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내 나이에 내가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면 심장이 쿵! 하고 끝도 없이 내려앉는다. 하...! 그러면 또 한 며칠 마음앓이를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더 애쓰지 않고, 마음의 힘을 풀고 기다린다. 애쓸수록 더 비참해지는 나를 잘 알기에, 결국 마음을 털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나를 알기에. 어쩌면 대추나무의 자신감도 바로 그런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느리지만 반드시 싹을 틔우고 말 것이라는, 화려하거나 예쁜 꽃은 아니지만 결국 열매를 맺고 말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강한 믿음 말이다.
생각해보니 대추나무의 자신감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가을, 겨울이면 가지치기 한 잔 나뭇가지를 모아 야외용 화덕의 땔감으로 쓴다. 다른 나무에 비해 결이 단단한 대추나무는 쉽게 불을 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불이 붙으면 마지막까지 은근하게 오래 타는 게 바로 대추나무다. 느긋한 대추나무를 보면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흔하디 흔한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한동안 나는 방향이 아닌 속도에 치우쳐있지는 않았는지, 속도계가 아닌 방향계를 다시 점검해봐야겠다. 나도 대추나무처럼 서서히, 끝까지 타오르고 싶다. 그리고 미안해졌다. 예뻐야만 꽃이 아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