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묻지도 따지지도 말 것!
아침부터 짜증을 부리는 둘째를 가만히 보고 있던 내가 문득 아이에게 말했다.
“너 나랑 오늘부터 100일 할래?”
나의 난데없는 말에 아이는 짜증을 멈추고, 뭔 말인가 싶어 나를 멀뚱히 쳐다봤다.
“잔말 말고 너 내가 시키는 대로 딱 3개월만 할래 말래?!”
평소와 달리 카리스마 철철 넘치는 나의 기세에 눌린 건지, 호기심인 건지, 아이는 고분고분히 그러겠다고 했다.
“좋았어! 그러면 앞으로 토도 달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고 무조건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이름하야 무조건 프로젝트는 그렇게 불현듯 시작됐다.
“아침 먹고, 화장실 갔다가, 문제집 풀고, 물 마시고, 피아노 연습하고, 화장실 가고, 점심 먹고 영어학습기 하고, 간식 먹고, 화장실 가고, 저녁 먹고 운동 가고... 또 씻어야 하고... 그러면 난 언제 놀아? 시간이 없잖아!”
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아이의 흔한 짜증 레퍼토리 중 하나인 시간 타령이다. 그러고 투덜거릴 시간에 부지런히 할 일 하고 놀면 좋으련만. 아이는 마치 벼룩시장에 물건을 내놓듯 자잘한 일들까지 늘어놓고 걱정부터 한다. 아니 걱정만 한다. 할 일이 이렇게나 많은데 언제 다 하고 노냐가 짜증의 핵심이다.
화장실 가는 것까지 할 일로 계산하는 아이를 보면서 피식 헛웃음이 샜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니 기본적으로 하는 일이 참 많기도 많구나 싶었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수많은 행동을 하는구나... 그때 알았다.
습관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일은 일이 아니다.
아이가 투덜거리는 일 대부분을 습관처럼 해버리면 이 짜증 지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제안한 게 바로 100일 습관 만들기, 무조건 프로젝트다.
사람의 행동이 습관이 되기까지에는 100일간의 반복, 그러니까 꾸준함이 필요하다. 곰도 사람으로 만들 만큼 꾸준함엔 장사 없다. 자기계발서마다 영업비밀처럼 말하는 ‘꾸준함’은 공공연한 비밀된 지 오래다. 그만큼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걸 해낸 사람 역시 별로 없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 ‘꾸준함’의 벽을 넘지 못하고 또 다른 인생의 비밀을 찾아 방황한다. 하지만 나도 알고 당신도 알다시피 결국 ‘꾸준함’만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은 곰이 사람이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왜?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아지면 변명거리도 함께 늘어난다. 그러다 보면 꾸준히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않아도 되는 변명들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그 변명은 자기 합리화의 명분을 준다. 작심삼일이 끝도 없는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이유다. 그래서 습관 만들기 프로젝트에 ‘무조건’이란 조건을 달았다. 토도 달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고 무조건!
사실 ‘무조건‘은 나의 육아 소신에 반하는 얘기다. 딱히 물려줄 미모도 재산도 없는 내가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도 좋은 습관 하나쯤은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 습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능한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했다. 그리고 기다려주는 것으로 내 할 일 중 8할은 다 하는 것이라 믿었다.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는 그런 나의 소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줬다. 첫째는 자신만의 분명한 루틴이 있다. 늦어도 아침 7시 이전엔 무조건 일어나 그날 풀어야 할 수학 문제집 풀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밤 유튜브 영상을 보며 2시간씩 홈트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해야 할 일을 미리미리 다 해놓고 남은 시간을 몰아서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한다. 내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는 자신의 루틴을 만들어 스스로 굴러간다. 그런 첫째 덕분에 나는 쿨하고 잔소리 덜 하는 우아한 엄마일 수 있었다.
하지만 둘째는 달랐다. ‘나중에’ ‘좀 있다가’를 입에 달고 사는 둘째는 할 일은 일단 미루고 본다. 미루고 미루다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됐을 때 짜증이 폭발한다. 밀린 일을 한꺼번에 하려고 하니 일은 커졌지, 시간은 없지, 감당할 자신은 없지, 지레 겁부터 먹고 결국 ‘망했어!’를 반복한다. 이러다 정말 망하겠다 싶은 나는 더 이상 쿨하고 우아한 엄마일 수만은 없었다. 그런 둘째 덕분에 나름 깨달은 바가 있다. 그동안 첫째가 잘해온 건 내가 잘해서 아니라 아이가 잘한 것임을, 두 아이의 차이는 타고난 기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다를 뿐이다.
음식을 먹을 때 두 아이의 기질적 차이가 확연히 보인다. 첫째는 맛없는 것부터 먹어치우고 맛있는 것을 나중에 먹으며 즐긴다. 둘째는 맛있는 것부터 먹고 맛없는 것은 미루고 미루다 결국 안 먹는다. 우리 인생도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게 인생인 것을 어쩌겠는가! 왜 먹어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일단 무조건 먹고 보자!
주부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오늘 뭐 먹지?’ 메뉴 선정이다. 그럴 때 차라리 누군가가 메뉴를 정해주고 ‘그냥 이거 해 먹어!’ 그래 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다. 어쩌면 아이도 그런 게 필요한 건 아닐까?
지금까지의 나는 자율성을 핑계로 아이에게 무기만 쥐어주고 나가서 잘 싸우고 오라고 입으로만 응원을 했단 생각이 들었다. 무기의 사용법을 알려주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했는데 난 그걸 못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면서 ‘스스로‘하려니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웠을까. 그걸 모르고 짜증을 내는 아이만 나무랐으니, 아이에게 미안해졌다.
“지금부턴 엄마만 믿고 무조건, 엄마가 시키는 대로 딱 100일만 해보자! 속는 셈 치고 한번 해보는 거지, 뭐. 인생 별 거니? “
오늘도 짜증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둘째에게 ‘무조건 프로젝트’를 외쳤다.
“수학 문제집 풀어.”
“하기 싫은데. 나중에 하면 안 돼? 좀 있다 할래!”
“어허! 토 달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당장!”
그러면 아이는 투덜거리면서도 한다.
“엄마, 나 다 했는데 이제 뭐해?”
“피아노 연습 해!”
어느새 군소리는 쏙 들어가고 내가 시키는 대로 미션을 해결하듯 할 일을 연달아 해치운다. 그러다 보면 할 일을 다 하는데 2시간이면 충분하다. 늘 시간이 없다고 동동거리던 아이도 후다닥 할 일을 다 해놓고 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경험을 100번 반복하다 보면 루틴이란 게 생겨서 스스로 굴러갈 날이 오겠지? ... 올까? 어허! 토 달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나부터 무조건 믿고 해 보기로 한다. 그때까지는 무조건, 무조건이다!
“나 할 일 다 했는데 이제 뭐해?”
“지금부턴 무조건 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