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일상이 되고, 일상은 여행이 된다.
대학교 시절, 남편은 학교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다 문득 바다가 보고 싶으면 그 길로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곤 했다. 방학이면 배낭 하나 짊어지고 한 달씩 여행을 다녔다. 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나와 결혼을 서둘렀던 이유 역시 여행이었다.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늙어가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일정 양의 스트레스가 쌓이면 여행을 떠난다. 주기적으로 스트레스를 배출하기 위해 여행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남편은 호모 비안스, 여행하는 인간이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다. 여행의 대부분은 남편의 즉흥적인 결심에서 비롯된다. 언젠가는 자는 아이들을 깨워 무작정 제주도행 비행기를 탄 적도 있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숙소를 검색하고 예약할 수 있다. 그것 하나 믿고 우리 가족은 집을 나선다. 당장 내일 잘 곳과 할 일만 대충 정해놓으면 여행 준비 끝! 그 이상의 계획도, 기대도 없다. 그저 여행을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들뜨고 즐겁다.
물론 꼼꼼히 검색하고 빠삭하게 알아보고 떠나는 여행에 비해 많이 느슨하고 허술하다. 그래서 손해도 많다. 예를 들어 숙소를 예약할 때 얼리버드 같은 혜택은 남의 일이다. 이미 팔린 좋은 조건의 숙소를 뒤늦게 보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러니 남들보다 돈은 더 주고 덜 좋은 곳에서 묵는 경우가 허다하다. 후쿠오카가 라멘으로 유명하다는 사실을 집에 와서야 안 적도 있다. 진즉에 알았더라면 누구나 들른다는 라멘 맛집에 우리도 줄을 서서 맛을 보지 않았을까?
그래도 후회는 없다. 비록 맛집은 아니었지만 추위와 허기에 지쳐 들어간 유후인의 어느 라멘집 라멘으로도 우린 충분했다. 아쉬움은 잠시,
“다음에 또 가면 되지 뭐!”
쿨하게 다음 기회로 넘긴다. 진짜 다시 가는 경우는 드물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지나고 보면 계획대로 척척 진행된 순탄한 여행보다는 좌충우돌했던 여행이 더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그렇게 여행은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남편이 여행하는 인간, 호모비안스라면 나는 기록하는 인간, 호모 아키비스트다. 사진으로 여행의 순간들을 기록한다.
대학시절 사진을 전공한 나는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전공자로서 응당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 눈으로 보고 가슴에 담기는 것들이 별로 없었다. 딱 뷰파인더만큼의 세상만 봤다. 그러다 알았다. 휴대용 카메라, 일명 똑딱이 카메라로만 사진을 찍는 사진가가 있다는 사실을. 꼭 무거운 대포 카메라로 찍는 것만이 좋은 사진이 아니라는 것을. 사진의 질보다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부터 무거운 카메라는 내려놓고 가벼운 카메라를 들고 다닐 수 있는 자유가 생겼다. 마음도 카메라도 가벼워지자 훨씬 찍고 싶어 진 것들이 많아졌다. 뷰파인더 밖 세상을 더 많이 보게 되자 가슴에 담기는 것들이 늘어났다. 그것들을 붙잡고 싶어서 사진을 찍는다. 게다가 요즘 스마트폰 카메라와 어플 기능이 얼마나 좋은지! 덕분에 사진은 기본, 영상으로 기록하는 재미까지 붙였다.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디지털카메라는 쳐주지 않았다. 필름은 곧 사라질 거라던 교수님의 예언도 무시했다. 그렇다한들 나는 필름을 고집하겠어! 절대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 감성을 따라올 수 없을 거라 믿었다. 그.... 그랬던 내가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한다. 디지털로 아날로그 감성을 재현하기도 하고, 손 안에서 촬영부터 편집까지 뚝딱 한다. 아날로그 감성이 아무리 좋아도 디지털의 편리성을 놓을 수 없는 나는 디지털 노예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디지털화된 기록들을 나는 다시 아날로그화해 포토북으로 남긴다. 거실 책장 한 칸을 아예 포토북 전용 공간으로 비워뒀다. 그 칸에 한 권, 두권 채워지는 포토북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뿌듯하다. 지나가다 포토북 책등에 적힌 제목만 봐도 그때 그 순간들의 추억들이 스친다. 아이들도 심심할 때마다 꺼내보며 추억을 곱씹는다. 사진으로 추억을 박제한다. 잘 찍은 사진 한 컷이 그 순간을 보다 의미 있고 멋들어지게 만들어준다.
어느 펜션에서 봤던 방명북이 생각난다. 그곳을 거쳐간 방문자들의 기록이 날짜와 함께 남겨져 있었다. 누가 봐도 초등학생 솜씨인 펜션에 대한 신랄한 비평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가장 최근 것부터 앞으로 넘기다 보니 2012년 5월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의외로 사람들은 단순 후기를 떠나 개인적인 마음을 남기고 있었다. 다시는 안 볼 거라 생각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술김에 그랬을까? 사람들은 꽤나 솔직했다. 꾹꾹 눌러쓴 손글씨에 담긴 누군가의 이야기는 마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처럼 짜릿하고 흥미진진했다. 그래, 이런게 바로 기록의 참재미지!
이별 후 혼자 여행을 왔는지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후회 섞인 뒤늦은 고백부터 모처럼 온 가족여행에 대한 소회, 프러포즈 등등... 펜션 발코니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경을 그림으로 남긴 이도 있었다. 삐뚤빼뚤 두서없는 글일지언정 그 안에 담긴 진심이 느껴졌다. 글의 대부분은 “우리 지금처럼 영원히 행복하자!”라는 다짐으로 끝을 맺었다.문득 궁금해졌다.
이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지금도 행복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호모 비안스인 남편은 여행을 통해 마음을 리셋한다. 호모 아키비스트인 나는 여행을 기록하며 두고두고 곱씹을 추억을 박제한다. 다시 말하자면 남편에게 여행은 미래고, 나에게 여행은 과거다. 결국 우리 가족에게 여행은 과거, 현재, 미래인 셈이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말인데 삶을 여행자처럼 살아보는 건 어떨까? 아니,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여행자처럼 살아가고 있구나... 싶다.
여행 끝에 집에 다다르듯, 지금의 허술하고 느슨한 시간들이 결국 어딘가에 다다르길. 남편은 그렇게 또 일상을 여행하고, 나는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며 일상을 기록한다. 그렇게 일상은 여행이 되고, 여행은 일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