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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호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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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Jan 30. 2016

#가덕도 기도원

그 가는 길은 순례자의 길처럼 험했다.

차에서 내려 바닷길을 30여 분을 걸었다.

섬 가장자리에 길을 뚫어 비포장 도로가 끊어질 듯 말듯 이어져 있는 곳.  밤늦게 플래시 불을 비추며 길을 더듬어 갈 때 저 멀리 보이는 도심의 야경이 그림처럼 빛났다.

그것은 이 어두운 세상에서 바라보는 천국처럼 아득히 보이기도 하였다.

가까이에는 물새들이 밤잠도 자지 않고 끄르륵 끄륵끄륵끄르륵 울었다.

칠흑처럼 까만 밤바다에서 우는 물새들이 저 멀리 천국을 향한 여정에서 탄식하여 우는 인간들의 모습처럼 느껴졌던 것은 왜일까? 우리가 걷는 그 돌길도 삶의 여정처럼 순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젊은 남자 선생님 한 분은 만두 도시락 스무 개가 든 아이스 박스를 들고

여자 선생과 나는 열 개씩 검은 봉지에 들었다.

단무지와 간장이 담긴 봉지는 여학생이 들었다.

늦게 합류하는 선생님들이 마음을 합해 산 찐만두였다.

차갑고 새까맣고 험한 길이었다.

다들 초행길이라 이어진 길만 보고 걷다 보니 저 멀리 아름다운 야경도  쏟아질 듯 알알이 박힌 밤하늘의 별들도 잠시만 돌아볼 뿐이었다.


길을 평탄하다가도 오르막길이고 또 시멘트가 발라져 있다가도 또 돌길이고 나무테크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오고 한참을 걷다 보니 영하의 날씨에도 목에 땀이 맺혔다.

걷기가 버거워질 무렵 작은 건물이 나타났다. 여자 숙소였다.

여자 숙소 옆 가느다란 산비탈 길을 걸어 올라가니 입이 쩍 벌어졌다. 가파른 언덕 위에 남자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숙소 중간이 샤워실.

비가 조금이라도 온다면 미끄러워 질 게 뻔한 가파른 언덕에 시멘트와 자갈을  밀가루 반죽을 으깨듯 발라놓은 듯한 길이다.

아슬아슬하게 길을 올랐다.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식당 옆 화장실은 저 아래  벼랑길을 내려가야 있고 기도원은 식당에서 고개를 한껏 젖히고 볼 정도의 산정상 가까이 못미친 곳에 있었다.

거의 산을 등반하는 수준. 이쯤 되면 통굽을 신고 롱 파커를 한껏 껴입고 온 나로서는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는 것이 난제였다. 다행히 길 옆에 철봉 지지대가 있어 그것을 잡고 천천히 올랐다.

기도원에 다다르자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가슴에 쓰러질 듯 가까이에 다가왔다.

기도원 안에서는 먼저 온  목사님과 선생님들이 아이들과 열심히 기도 중이다.

문을 열자 땀냄새가 훅 끼친다.


요즘 중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와도 그들만의 고민이 많은  듯하다.

학교 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 과다, 우울증, 스마트폰에의 집착 등등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거의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본다.

"뭐가 모자라서 그러냐. 우리 때는 정말 힘들어도 다 견뎌내었다."

우리 때는 물질적으로는 부족하긴 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자유시간 없이 떠돌지는 않았다.

매번 방과 후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이 기분전환 겸 싸구려 매니큐어를 바르면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불량 아이들처럼 대하고 책을 읽지 않는다고 타박한다.

어려서부터 이미지에 익숙한 아이들은 책을 읽도록 흥미를 주어야 하고 또 여유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아이들은 경쟁 사회에 던져져 피곤하게 살아간다.

공부를 잘해도 스트레스, 못해도 스트레스다.

이런 아이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 시간.

교회의 방학 수련회는 그런 점에서 매우 뜻이 깊다.


기도를 할 때 아이들은 자신의 잘못된 점들을 돌아보며 회개를 하고 서로 서먹했던 친구들이 다가와 기도를 하며 손을 잡아준다. 늦게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선생님들이 공수한 라면과 만두를 간식으로 먹고

숙소에서 밤이 새도록 키드득 거리며 놀았다.

둘 째날

춥지도 않은지 차가운 물에 머리를 감는다고 난리인 아이들.

우리 선생님들은 머리는 아예 엄두도 못 내고 겨우 이 닦고 세수하고 그만이다. 간밤 수도관이 얼어서 따신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문득 고등학교 때 설악산에 수학여행가서 산에서 흘러내리던 얼음물에 머리를 감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머리가 냉물에 담가지자 마자 멍해지던 그 순간,

그때 아이들의 뇌는 차가운 물에 기능을 정지할 수 밖에 없었으리라.


맑은 산의 정기와 바닷가의 비릿함이 공존하는 기도원.

안개가 자욱하다.

물새들은 잠도 안자는지 아침에도 계속 끄르륵 거리고 운다. 어디에 모였는지도 보이지도 않고.

아이들은 이른 아침 미역국에 찰밥, 정갈한 어묵무침에 채소무침을 먹고 또 기도원에 오른다.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속속 들어온다.

많이 친해진 친구들, 간밤에 서로 속 이야기 들을 털어놓으며 가까워졌겠지.


 목사님의 설교를 요약해 본다.


    호세아서 11장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여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

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

5. 그들은 애급 땅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 칼이 그들의 성읍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그들의 게책으로 말미암음이니라.

7.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그들을 불러 위에 계신 이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 아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히 온전히 불붙는  듯하도다.


5장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자에게는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된다.

앗수르는 세상의 죄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죄의 억압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 삶.

그렇게 되면 칼이 그들의 마음을 치며 마음의 빗장을 깨뜨린다. 이는 죄악을 마음으로 제어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번 선택한 당신의 백성을 그냥 두시지 않는다고 한다.

8절에 '아드마'와 '스보임' 이 나오는데 이는 예전 소돔과 고모라의 땅 근처에 있던, 성적으로 타락했던 소돔 땅의 악한 습을 조금씩 따라 했던 도시로 소돔이 망할 때 같이 덩달아 망했다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아드마'나 '스보임'같이 두시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불붙는  듯하다고 하신다.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교회에 나오면서도 갈등하고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자존감을 심어준 말씀이라 생각된다. 십자가의 사랑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그저 감사할 뿐.

나 역시도 교회의 이런저런 일들과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한 적이 있었던지라 하나님의 이 말씀 안에서 아버지의 긍휼을 느꼈다.

목사님의 말씀 후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 아이들이

세상에 나가 살 힘을 주는 이 수련회의 이박삼일이 귀하게 느껴졌다.

오후부터는 겨울비가 내렸고 우리 교회 담임 목사님이 찾아오셨다.

점심으로 볶음밥을 먹고 목사님이  사 온 빵으로 간식을 하며 아이들을 오후의 또 다른 스케줄을 기대하였다.

나는 전날에 너무 무리해서 다리가 심하게 아팠으므로 일박만 하고 먼저 나왔다.

그러나 남겨진 그 아이들이 얼마나 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또 힘을 얻을지 기대가 되는 수련회였다.



          깊은 밤, 가덕도의 해안길을 걸을 때 멀리 보였던 도시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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