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화사한 봄볕이
베란다 창안으로 비쳐 드는 날엔 집안이 괜스레 어둠침침해 보인다.
오늘은 우리 아파트 장이 서는 날,
분명히 봄꽃을 파는 이모가 와 있을 거야. 오후 아파트 장터를 들어서니 처음 보는 이불 장수가 와 있다.
봄의 계절에 맞게 전부 꽃무늬다. 이불 장사 한지 일주일 밖에 안되었다는 선량한 아저씨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듣다가 겨우내 덮었던 묵은 이불 생각이 나서 충동구매를 하고 말았다. 무척 보드랍고 가볍다.
한번씩 우리 집에 와서 주무시고 가시는 엄마가 허리기 아프다고 해서 매트리스를 보는데 푹신해 보인다. 매트리스가 제법 두꺼워서
"이거 혹시 스펀지 아닌가요?"
했더니
"이거 스펀진가 아닌가 함 보시죠. "
하면서 아저씨가 지퍼를 찾는데 비닐에 꽁꽁 싸여 지퍼를 찾기가 힘든지,
"지퍼가 어딨는지 못 찾겠네.. 한 번 써보세요. 저도 깔고 자는데 참 편해요."
그런다.
"스펀지면 안 살건데.."
좀 망설였다.
그때 마침 이불을 보러 온 부부가
"그 매트리스는 솜을 눌러 만든 거예요. 우리가 이불 장사해봐서 알아요."
한다.
그때서야 아저씨가
"아이고 진짭니까? 나도 몰랐어요. 이불 장사 시작한 지 처음이라.."
하고는 머리를 긁적긁적. 참 저렇게 순진한 아저씨가 장사를 어떻게 할지 걱정된다. 그러나 그런 순수함이 좋아서 매트리스까지 사기로 하고 계산한다. 이불 장수 아저씨가 첫 마수라며 입이 귀에 걸린다.
몇 달 간 장이 안 서서 서운했는데 둘러보니 장사꾼들이 전부 바뀌었다. 가방 장수도 보인다. 이렇게 싸도 될까 싶을 만큼 예쁜 가방들이 즐비하다.
그 옆에는 재래식 빗자루를 고르는 아저씨가 있다. 나도 써보니까 나일론 빗자루보다 댑싸리로 만든게 좋더라. 나일론 빗자루는 쓸수록 보기싫게 뭉치지만 댑싸리나 억새로 만든 빗자루는 예쁘게 닳아간다.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들도 가득하다. 플라스틱에 질린 사람들은 이런 자연산 나무껍질로 만든 소쿠리들을 선호할 듯하다. 저기 채반에 오징어를 숭숭 썰어 넣고 부침개를 해서 펼쳐 놓으면 봄바람에 선득선득하니 식어서 맛날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숟가락은 좀 싸고 박달나무로 만든 것은 좀 가격이 비싸다. 박달나무 숟가락을 하나 샀다.
이번엔 싱싱한 과일들. 딸기들은 이제 인기가 시들해질 시간 아닌가. 딸기는 작년 12월부터 보였는데 말이다.
싱싱한 토마토.
토마토를 썰어넣은 샌드위치는 참 신선하지. 아님 치즈를 얹어 발사믹 소스를 쳐서 먹어도 좋은데.
아파트 이동장터인데 카드 가능이라고 쓰여 있다. 주인이 젊은 총각인데 아주 싹싹하다. 청춘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것. 청춘이여 그대들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길.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른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오. 한 다라이 팔아주고 싶은데 이미 오전에 마트서 과일을 사버려서 이만 지나친다. 참외는 여름과일인데 이렇게 벌써 얼굴을 내밀고 어쩌라고. 이제 딸기들이 참외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말리라.늘씬늘씬 고무 마들과 퉁퉁한 연근들. 지난 겨울에 고구마를 너무 지나치게 먹어서 좀 질린다.
알타리 무를 보니 알타리 김치가 먹고 싶다.
봄이나 여름에 제일 좋아하는 김치가 총각무 김치와 열무김치다. 여름엔 보리밥을 갈아서 열무김치를 물이 자작자작하게 담근다. 그것이 시큼하게 익을 때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으면 한 여름 낮 점심으로도 좋고 장마철에도 기분을 시원하게 하는 맛난 김치다. 족발이 보인다. 아주 먹음직스럽게 삶아진 듯하다. 누군가의 집에서 술안주나 간식으로 맛나게 뜯길 준비를 하고 있다. 아님 저녁에 마음이 바뀌면 내가 족발을 사러 갈지도.
만두와 어묵들. 바로 그 자리에서 튀겨 판다. 예전 어묵장수가 아니다.
작년까지 우리 아파트 장터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던 어묵장수는 뚱뚱하고 넉살 좋은 아저씨였는데
아파트 주민들이 그 어묵 리어카를 그냥 지나가지 못했다.
가령 50대. 60대 여인들이 지나가면
"누나~ 누나 ~어묵 사 갖고 가요."
순간 지나치던 사람들은 주변에 누가 있나 보다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인 줄 알고는 하하 웃고 또 어묵을 한 두 개씩 사가지고 갔다. 어묵을 두개만 달라고 할 때도
"예쁜 누나야 두개 하면 한 개 이천 원이고 세 개 하면 오천 원이다."
그러면서 슬쩍 세 개를 넣는다. 이럴 때 좀 까칠하게
"아뇨 두 개만"
그러면 즉각 한 개를 덜어내고
"넵, 알았어요~"
그러면서 장사를 하였는데 이번 입찰에서 빠졌던가 보다. 말 한마디로 아파트 할머니들을 누나로 만들어 버린 아저씨는 이제 어느 아파트 장터에서 누나 누나하고 있을지.
늘 봄은 오는 것이지만 이렇듯이 예쁘게 자란 꽃들을 보고 어찌 지나치랴.
꽃장수만 예전 그대로이다. 이 꽃장사 여주인에게 여자손님은 그저 이모다.
좀 깎을라치면 그 특이하게 높은 음으로
"이모오~그라믄 남는게 없다."
며 에누리를 안해준다.
그래도 누군가가 슬쩍 작은 꽃 화분을 잡고서
"그럼 이거라도 서비스로 줘"
하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아~참 미치겠네~우리 그렇게 팔고 뭐 묵고 살라꼬?"
그러면서도 그냥 준다.
칙칙했던 겨울의 빛을 무안하게 하리만큼 아름다운 각각의 색깔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봄꽃들. 누군가는 저 꽃 한 개로 마음속에 응어리 하나를 풀 수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분갈이를 하며 또 새 희망을 품으리라.
작년에 산 꽃들이 겨울을 지나며 다 말라죽고 이젠 꽃을 사지 않겠어 라고 다짐을 해도 봄이 불러내는 소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다들 장에 나선다. 그리고 아낌없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꽃값을 지불하고 분명 몇 달도 안 갈 꽃을 가슴에 품고 온다.
나이가 들수록 꽃에 대한 열망은 커지는가 보다. 꽃 파는 주변에는 할머니들이 많다. 이미 가버린 젊음에의 아쉬움이 찬란히 피어오른 봄꽃들에 가슴이 설레기 때문일까. 봄꽃이 주는 위안은 생각보다 큰 듯 하다.
월요일마다 장터를 돌며 꽃을 사고 또 먹을 것을 사고하는 이 시간들 속에서 삶의 생동감을 느낀다. 매번 계절이 지나고 봄이 오듯이 월요일마다 서는 장날에, 겨우내 집에 있던 사람들도 나와서 장터에 모여들고
강아지들도 털을 깎고 주인따라 산택을 나선 경쾌한 봄의 오후.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었기에 올 봄은 더 반갑고 따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