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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셸 오 Mar 13. 2016

#모임을 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들

믿는 자들에게 소모임은 가정예배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또 오래전부터 해온 것이다.  교회마다 이름은 달라도 가까운 이웃끼리 모여 믿음의 교제를 하며 서로 돕고 친목을 쌓는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런 모임은 기독교인들만의 모임이라 폐쇄적이라고 오해를 받는 듯도 한데 사실 알고 보면 이런 모임은 폐쇄적이라기보다 대단히 개방적이다. 가까운 이웃이든 친구든 본인이 원한다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믿는 자들이 믿는 자들끼리의 모임을 즐겨하지 않는 듯하다.

"시대에 맞지 않게 집안을 공개하는 것이 쉽지 않아."

"찬송가 소리가 시끄럽다고 아랫집에서 뭐라 해."

"사적인 고민들을 나누기가 부담스러워."

"꼭 그렇게 모여야만 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걸로 안되나?"

"따로 모임에 갈 만한 시간이 나질 않아."

등등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개인주의가 팽배해지고 바쁘기만 한 세상에서 믿는 자들의 모임은

어떻게 이루어져야만 할까.


히 10장 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성경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그 날이 가까워질수록 모이자.

닫음의 반대는 여는 것이다. 모임은 연다라고 하고  개회라고 한다. 그러나 모임의 끝장은 닫는 것이니 폐회라고 한다. 공동체 모임을 자꾸 닫으려 하면 습관이 되고 그러면 공동체는 무너진다.

그래서 오로지 권한다.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그 날은 마지막 때가 아닐까. 개인주의가 더 만연해지고 사적인 공간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고 익명성이 존중받는 사회. 그리고 더욱 바빠지는 삶. 믿는 자들끼리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보수적인 것처럼 보일 때. 예수를 믿는 것이 부처를 믿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때가 아닐까. 많은 체험을 한 기독교인들조차 교회의 보수성에 반대를 한다. 또 반대로 너무 문화적이고 세속화되는 것에도 반대를 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자

-세상일에 바쁜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사업적으로 가정적으로 남편을 돕고 아이들을 양육하느라 바쁘게들 산다. 그러나  사실 들여다보면  그 바쁜 일들도 결국 본인이 만들어 낸 것이 대부분이다. 즉 하고 싶은 일들을 먼저 하고들 있는 것이다.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은 뒷전으로 자꾸 밀린다.  아무리 바쁘다 하나 본인의 마음에 있으면 바쁜 중에서 시간을 억지로 내고 또 낼 수 있는데도 말이다. 바쁜 사람들은 정말 생계에 매달려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지. 이런저런 친목이며 사교적인 모임. 그리고 취미생활로 무엇인가를 배우러 다니느라 바쁜 것은 진정 바쁘다로 할 수 없다. 뭐든 마음 가는 곳에 몸도 가기 마련이니까.

은혜받아서 교회에서 열심을 내면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이일 저일 한꺼번에 맡기는 것도 또 하라는 대로 맡아서 벅차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누구나 예수님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에 소속된 자로서 한 가지 일은 분담하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염치를 세우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 믿는 자들끼리 서로 모이기를 힘을 써야 한다는 것. 작은 목자로서 우리 목장에 소속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면 예의 바르게  응대는 하지만 굳이 목장 모임까지 참석하여야 되느냐는 분위기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하게 인식도 안 하는 것 같고.

또한 억지로라도 그들을 권면하여 믿음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려는 소박한 뜻을 곡해하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거나 수신 차단을 하거나 하면 솔직히 나도 인간인지라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이게 무슨 고충인가 한탄을 하였더랬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도 하였었다.

'목사님들은 월급이나 받지 우린 무료 봉사에 시간과 열심을 내고 상처만 받고 모임에 안 오겠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오려는 것 같아 괜히 이상한 사람이 되는 기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순전히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이지 대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며칠 전의 첫 모임 역시 일주일 전부터 미리 전화를 하고 금요일에 모임을 한다고 성의껏 한다고 했는데 겨우 세 사람만 왔다. "세 사람이나 오다니"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오지 않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닌 듯하고 또 자주 전화해서 오라고 귀찮게 구는 것도 못할 짓이고. 진퇴유곡이다.


모이기를 힘쓰는 자

  그 날 이런저런 핑계로 또는 일이 생겨서 오지 않은 분들도 있었으나 시간에 맞춰 모임에 오신 세 분의 집사님들이 있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어부직을 그만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말씀 앞에서 세상의 것들을 손에서 놓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며 삶을 나누었다.

세상 속에 파묻혀서 세상 일에 손을 떼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역설적이기도 하다.

먹고사는 문제와 자식 문제만큼은 다들 자신이 없는 눈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의 그 믿음이 절대 부족하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우리들의 연약함을 예수님이 다 짊어지셨다.

그리고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서는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된 것이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도 나누었다. 그래서 모이기를 힘쓰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유익임을 다시 인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말씀을 나누다 보니 그동안의 삶이 슬쩍슬쩍 나오고 서로 공감하며 그와 비슷한 경험들이 오가고 그렇게 시간은 훌쩍 흘렀다. 마음속의 고민들은 밖으로 꺼내지면 아주 작아지고 또 해결책이 나온다.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어떻게 해야 믿음을 지킬 수 있는지도 절로 깨닫게 되고 혼자 힘으로 안 되는 문제들은 서로 기도해주기를 부탁하며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무엇보다 믿음을 지키려면 기도와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기도와 말씀을 소홀히 하면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지고 만다.

마음이 허해지고 우울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며 육신이 피곤해지면 악한 영이 침입하기도 쉬워지는 듯하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을 만한 내성을 키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믿는 자들이 모여 서로의 믿음에 대해 조언을 받고 권면하며 서로 합심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가진 자들은 교회의 소모임에 적극 참석하고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끌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믿음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성경을 꾸준히 읽으며 기도도 꾸준히 함으로써 대개 평안함을  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일에 바쁘고 세상살이에 눈을 돌리면 육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삶에 주어진 시간은 동일하기에 어디에 더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가는 본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그런 분별력을 얻으려면 믿는 자들의 모임에 들어와 자신의 신앙을 자꾸 돌이켜보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부름을 받은 영적 공동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우리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소그룹에 속에서 삶을 나누는 것도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그룹에서 우리의 삶을 나누는 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나누는 것이므로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아서도 안되고 세상일은 육적인 삶이니 영적 삶에도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엡 6장 12 절-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공동체적 삶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삶이다. 누군가가 말하더라. '삶'이란 단어에서 'ㅁ'을 아래도 쭈욱 내리면 사람이 된다는 것을. 삶은 바로 사람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으로 연대의식으로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삶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혼자가 편하다고 외쳐도 결국 그것은 외로움을 감춘 공허한 외침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이기를 힘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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