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호와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셸 오 Apr 04. 2016

#갈 바를 모를 때

기도로 인내하며 기다리기

창세기 26장 1절-25절

1절-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삭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 가나안에서 흉년을 맞게 된다.  그래서 그랄로 간다. 그러나 그랄에서 또 애굽으로 가려하였다. 그랄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았던가 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신다. 여기서 본문에 보면 이삭은 애굽에는 안 가지만 그랄에 그냥 거주한다.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이 그랄일까?


3절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문맥적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이 바로 '이 땅'이 된다. 그래서 이삭이 현재 거주하는 그랄로 해석이 되기도 한다.  나는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지시하신 땅이 그랄인 줄 알고 왜 하필 이방인의 땅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3절의 끝에 보면 '내가 네 아버지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지시하신 땅은 가나안이 된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가나안 땅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은 그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로 6절에 그랄에서 거부가 된다. 아무튼 그는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의 고생을 잊고 그랄에서 살아도 될 것처럼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떠나거나 불순종해도 일이 잘  풀리거나 부자가 될 수 있다. 그것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다. 보통은 자신들의 선택이나 능력  덕분이라 생각하지만.


  6절- 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12절- 이삭이 그 땅에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마침내 거부가 되어,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자가 된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의 대상이 된다.(14절)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막아버린다.(15절) 아무리 땅이 많아도 물이 없으면 살 수도 없고 농사는 더더욱 지을 수가 없다.

그리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도 이삭에게 떠나라고 한다. 이게 웬일인가. 살만하다 싶어 졌는데 그 땅에서 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삭은 점차 우물을 찾아 옮겨 다니게 된다. 처음에는 풍년의 땅에서 골짜기로 쫓겨난다. (17절-18절)

우물 찾기의 경로를 보자. 

그랄 골짜기에서 그의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판다(18절)--->또 다른 우물 (21절)---->다른 우물(22절)--->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25절) 이삭이 마실 물을 찾아 나선 길의 종착지는 브엘세바다.!!

물을 찾아 떠났으나 계속 막혔고 궁극적 도착점에 이르자 물을 얻을 우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의 땅에서는 골짜기에서조차 물을 얻을 수 없었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갔을 때 여호와께서 밤에 나타나신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고 자손이 번성하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22절 :3절. 4과 비교)

이삭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장막을 친다. 거기서 우물도 파고.(24절-25절)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였을 때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이 결코 옳지 못함을 그는 깨달았고  하나님께 불순종했음을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삭이 임의대로 갔던 땅으로부터 점차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부자가 되더라도 물샘이 없으면 끝장.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이 아니면 주변의 시기나 방해로 폭망.

그래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주신 땅.

 애굽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삭이 세상 속으로는 발을 딛지는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세상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요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다. 이집트로 가지 말라는 말에는 순종하고 가나안으로 가라는 말씀에는 따르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들이다. 어떤 것은 순종하고 어떤 것은 순종하지 않고.

한쪽 발은 세상 속에 한쪽 발은 교회에. 이런 식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왔고 또 보고 있다. 

분명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세상 속 사람들과 가치관이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선택한 길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이라고 착각한다.  오늘의 성경말씀에 비추면 이런 삶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감하겠지만 믿음이 깊어질수록 세상의 문화에서 점점 멀어진다. 예배의 삶을 살면 세상적인 것들에 흥미를 잃기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 그렇게 된다. 그래서 믿는 자들끼리의 모임이 형성되고 그곳에서 믿음의 공동체가 생겨난다. 그렇게 하다 보니 폐쇄적이라는 편견도 생겨나는 것이리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라면 믿음을  떠난 그들의 부요한 삶에 물줄기를 막고 결국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생명의 물샘을 찾아 하나님 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의 자녀들은 자신들 멋대로 사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왔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그제야 하나님의 제단을 세웠고 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있다. 이삭은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고 반대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목적지가 없었는데도 순종하였다.  


히브리서 11장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례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갈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즉 그런 믿음이 어디서 온 것일까?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현재형) 땅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미래형) 땅으로 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미리 땅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면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무작정 길을 떠난 것이다.

이 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할 때 목적지도 없이 살던 짐을 꾸리고 떠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달리 이삭은 이미 준 (현재형) 땅을 보지 못하고 나아갔다. 아니면 준 땅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인간은 삶의 한 과정 속에 놓여있고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도달점은 있지만 내일 죽더라도 오늘의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절박한 생계의 문제에 놓여있다. 그래서 미래를 알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는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비록 힘들더라도 기도하며 참고 견디는 것과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서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좋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모임을 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