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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수박을 우적우적

수박을 입안 가득 담고 두 손은 흠뻑 적셔도 좋아

by 미셸 오


어제

뜨겁고 텁텁한 천으로 세상을 가린 듯 숨 막히는 한 낮을 보내며 그 어느 때보다 수박에 대한 간절함이 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원한 수박이 떠오른다.

밤새 잠을 뒤척이고 일어난 아침에는 주황빛 아침 햇살이 집안에 가득 차 오르고 온갖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가득하여지며 잠시 해가 가려지는 듯하더니 습기도 서서히 일어난다.


예전에는 수박 한 덩이를 사면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었고 그것이 남아서 냉장고에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땐 넉넉지 않은 수박을 늘려 먹으려는 의도였는지 몰라도 수박화채를 많이 해서 먹었다.

얼음에 사이다까지 부어서 먹던 화채는 그냥 잘라서 수박 맛만 느낄 때 보다 맛은 덜했다.


요즘은 가족 수는 적어졌는데 수박은 훨씬 커지고 맛도 좋아진 듯하다. 그리고 한 덩이를 사면 늘 남고 부담스러운데 반으로 잘라서 파니 수월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에는

여름에 수박밭에 가서 수박 한 덩이를 서리하고픈 마음이 간절했던 때도 있었다.

동화책에 나오는 과수원 원두막 아래 잘 익어서 뒹구는 수박만큼 혹하는 것이 있을까.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에는 수박밭은 커녕 참외밭도 구경할 수 없는 바닷가였으니. 그것은 그저 꿈에 불과하였다.


며칠 전에 방광염에 걸린 엄마가 수박을 사고 싶다고 해서 아파트 입구 과일집에 들렀다.

작고 통통한 젊은 남자가 운영하는 과일가게다.

늘 친절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능숙한 장사꾼의 기질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사실 속을 알 수 없는 수박은 통째로는 사지 않는데 수박 반 덩이를 사러 마트까지 가긴 좀 멀고

한통을 사서 친정엄마와 반반씩 가르기로 했다.

수박을 손으로 두드려 보고 사는 것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매번 경험한 이후 속이 환히 보이는 수박을 사는 것이 안전하다고 믿지만 때론 생각대로 살아지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이다.

마침 가게 앞 박스에 수박 네 덩이가 담긴 것이 보였다.


"오늘 수박 들어온 것 있어요?"


하며 들어서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인은


"오늘 수박 참 좋습니다."


라고 하며 자신이 직접 수박을 선뜻 골라주는 것이다. 수박을 골라내는 그의 손놀림이 무척 경쾌하여서 오늘 수박은 싱싱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박을 좀 잘라주세요. 두 집에 나눌 거라."


주인은 기분 좋게 수박껍질에 칼을 갖다 대고 그것은 땅이 갈라지듯 금이 쩍 갔다.

'음 잘 익은 모양이군'

그러나

반으로 갈라져 벌러덩 나자빠진 수박 안은 별로였다. 이미 껍질 테두리부터 절반 이상이 너덜너덜해진 속살이 흐리멍덩한 붉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 수박이 너무 안 좋네요."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당연히 다른 수박으로 바꿔줄 줄 알았으나 주인은


"이 정도면 요즘 수박 치고는 괜찮은 겁니다."


주인은 당황하면서도 어떻게든 팔려는 눈치다.


"그래도 어느 정도지 너무 안 좋다"


나는 마침 냉장고에 반으로 잘린 수박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수박은 주황빛의 싱싱한 속살을 내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여기 반 잘린 수박은 속이 이렇게도 좋은데"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때였다. 주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래서 내가 수박을 반으로 잘라서 안 파는데."


상한 수박을 억지로 떠 넘기지는 못하겠고 안 잘라서 팔면 이런 손해는 없을 건데 라는 의미로 들렸다.

수박이 맛이 간 것을 보니 저도 기분이 상한 모양이긴 한데 그렇다고 손님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그동안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철따라 포도. 귤. 사과. 배 등등을 얼마나 샀는데 뻔히 속이 보이는 수박을

먹지도 못할 것을 어쩌란 말인지. 그의 혼잣말을 안 들은 척하면서도 기분은 덩달아 상하고 말았다.

결국 주인은 붉어진 얼굴로 반으로 잘린 수박을 랩으로 싸기 시작했다.

나는 상한 수박 대신 냉장고의 수박을 사면서 미안한 마음에 자두 한 팩을 일부러 더 샀다.


"안녕히 가세요"


얼굴색을 다시 바꾼 주인이 내 등 뒤로 인사는 하였으나 이미 내게 속마음을 들킨 주인에게 다시 과일을 살 마음은 깡그리 사라진 순간이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장삿속이라는 말을 하는가 싶었다.

이와 달리 우리 아파트 장터 안에서 과일을 파는 총각은 어떠한가.

일주일에 한 번 장이 서는데 사람들은 그 총각의 순수함과 솔직함을 좋아한다.



언젠가 수박 한 덩이를 산 적 있는데 그는 수박 한 한 통을 잘라 넉넉하게 시식을 하도록 해 놓고는


"가서 드셔 보고 맛이 어떤지 말씀해 주세요."


라고 했던 것이다.

수박 속은 그렇게 만족스럽지도 않고 달지도 않았지만 총각의 마음 씀이 예뻐서 수박이 이렇게 안 좋아서

어떡하나 하고 오히려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시 장에 갔을 때


"수박이 달지는 않아"


라고 넌지시 말해주었더니


"아~큰일이네 이거 오늘 다 팔아야 하는데~" 하며 울상을 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도 산지에서 수박을 사 올 때 속이 어떤지 알지 못하고 사 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수박을 잘라낸 후 속이 안 좋은 수박은 주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거의 교환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장사는 마음을 파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사실 장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대개 물건을 사다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거 어제 팔다 남았는데 판매는 좀 그렇고 그냥 가져다 드세요." 한다.


그러면 그 주인의 마음은 집에 와서도 남고 다음에는 꼭 그 집에서 사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돈을 받고 팔아서는 안될 것을 판 사람들의 물건은 집에 와서 먹을 때 기분이 상하게 마련이므로 다음부터는 발을 끊게 되는 것이다.


해마다 이 때면 수박을 먹으며 더워진 속을 식히기도 하지만

그 알 수 없는 수박 속 때문에 속이 상하기도 하는 것이 여름의 맛인 듯하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수박을 싹둑 잘라 그 과육에 얼굴을 파묻고 달디단 과즙을 입안 가득 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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